순천시 서면 압곡리 산 103-2번지 일원의 서면 구랑실재는 여순사건과 6·25전쟁 당시 3번에 걸쳐 집단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구랑실재는 순천 서면 삼거리에서 구상리와 광양시 봉강면으로 넘어가는 주요 교통로였으며, 현재는 고속국도 건설로 인해 높은 재를 깎으면서 지형이 많이 변했다. 첫 사건은 1949년 9월 16일 광양읍 습격사건 다음 날 사찰계 경찰들이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연행해 광양 외곽 지역인 이곳 구랑실재와 쇠머리, 세풍리 등지에서 사살했다. 당시 광양경찰서 경비계 순경이었던 최○○(당시 23세)는 봉기군에게 습격
순천시 해룡면 호두리 719-2 일원에 위치한 검단재(검단고개)는 여순사건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의 집단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지금까지 다수의 사람들이 검단재 학살지를 광양읍 석정리 검단마을 인근 거성주유소 앞 큰길 건너편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희생자 유가족들의 고갯길 옆에 철도가 있었다는 증언을 참고하면 광양읍 석정리 검단마을이 아니라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검단재가 맞는 것으로 확인됐다.1949년 9월 16일 오전 2시께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경찰서와 각 지서, 주요 관공서, 제15연대가 주둔하고 있던 광양서
광양읍 인서리에는 옛날 광양읍성 남문 앞쪽에 위치한 전통적인 주택지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골목 안에 남아있다. 최근 도시 재생 사업으로 단정하게 손질되었다. 이 중에는 문이 항상 굳게 닫힌 고택이 있었는데 이문화 고택이다. 이 집은 이문화의 선친이 구입한 것으로 150년이 넘는 전통 한옥이다. 1948년 10월 20일 무렵 여수・순천10・19사건 때 광양읍에 도착한 14연대 반군들이 당시 이 집을 점거하고 본부로 삼았다. 1951년 2차 빨치산 습격 때에는 근처의 집들과 함께 본채를 불태워버리고 아래채만 남겨두었다.
광양읍 덕례리 108번지 무선마을과 세승마을 사이에 위치한 무선재(무선쟁이 고개)는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무선재(무선쟁이 고개)는 세풍 간척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세승지역 주민들이 광양읍내장을 가거나 학생들이 등교할 때 모두 이 고개를 넘어 다녔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고 있다.1948년 11월초 경찰과 토벌군 한 무리가 14연대 군인 한 명을 포승줄에 묶은 채 80여 가구가 살고 있던 세승마을로 들이닥쳤다. 집집마다 수색하여 젊은 사람들을 무작정 끌어냈고, 마을 앞 200평 정도
광양시 광양읍 칠성로 71-4 매밑재(산저마을) 산저마을회관 일원은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1948년 11월 초 광양읍 우산리 주민 홍옥동(남, 34세)이 좌익으로 모략을 받고 경찰에 연행된후 광양시 봉강면 입구 매밑재에서 사살됐다.당시 홍옥동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광양읍 우산리 고향으로 돌아왔다. 최모씨(당시 25세)의 진술에 의하면 홍옥동은 집안이 부유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당시 일부 주민들으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이 때문에 여수·순천10·19사건이 일어날 무렵 좌익이라는 모략을 받았
관광 활성화보다 시급한 것은 산업 활성화… 기반시설 활용 필요낮은 지지율 현실이지만, 결코 낮지 않아 조금씩 전진해 나갈 것시민 졸로 생각하는 ‘민졸정치’ 아닌 주인으로 섬기는 정치 할 터국민의 힘 이정현 출마예정자가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예비후보자로 등록하지는 않았다. 당 특성상 험지에서의 도전이다. 반면 그는 서민적이면서도 열정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3선 국회의원의 저력을 보여줄 것이라는 관심이 간다. 이정현 국회의원 예비후보를 만나 이번 총선에 대한 각오를 들어봤다.
광양시 광양읍 신재로 10번지 광양 농업창고 인근 인동리농가는 여순사건 당시 미군 폭격에 의해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1950년 8월 27일 광양읍 인동리에서 미군 폭격사건으로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오전 8~9시경 광양읍 인동리 북쪽 방향에서 전투기 1대가 날아와 폭탄 2발을 투하하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폭탄은 최모씨(1939년생)의 외갓집과 농업창고 뒷집(빈집)에 떨어졌다. 이 폭격으로 최씨의 아버지 최중기(당시 56세)와 형 최정윤(당시 16세)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또, 어머니 장송무(당시 46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 867 용강공원 인근에 위치했던 관동마을은 여순사건과 관련해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1950년 7월 28일 광양군 광양읍 사곡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박주원(34)이 마을 뒷산 도둑골에서 인민군에 의해 희생됐다. 이때 박주원의 둘째 동생 박주윤도 인민군에 의해 총살됐다.박주원은 광양 사곡리에 위치한 광산에서 근무했고, 박주윤은 용강리 관동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박주원의 첫째 동생 박주인은 고흥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1950년 7월말 경 구례 쪽에서 광양으로 인민군 선발대가 진입하면서 퇴각하던
노동운동 사회운동 넘어 지역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에 출마 결심정치인, 지역을 위한 움직임 보여 줘야… 지역역량 키울 기회 제공당내 경선 과정 비방 자제 필요… 경선 끝나면 원팀으로 임해야지역발전 위해 중앙 오가면서 큰 그림 그려주는 것이 국회의원 역할이충재 예비후보가 지난 30여 년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비전을 바탕으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결같이 노동자 곁은 지킨 그의 소신은 지역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충재 예비후보를 만나 오는 4월 총선에 대한 각오를 들
광양시 광양읍 구산리 576 일원 우두마을(쇠머리)은 여순사건과 관련해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장소를 구체화하면 우두마을 당산나무 앞 도로변 개울가가 된다.광양읍에서 봉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우두마을은 소가 엎드린 모양 지형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양읍 습격사건 직후인 1949년 9월 17일, 광양경찰서 경찰은 주민 약 40명을 광양읍사무소 광장 앞에 집합시킨 후 이곳 우두마을(쇠머리)로 데려와 집단 사살했다. 백운제 저수지가 생기기 전 지형상 가장 낮은 곳에 사람들을 4열로 세워놓고 당산나무 쪽
국정경험 두루 갖춘 국회의원 필요…이런 면에서 내가 최적임자힘의 논리 아닌 여성으로 바라보는 생활인 관점서 변화 이끌 것편가르기・무소신・분열의 정치를 포용과 균형의 정치로 바꾸어야권향엽 예비후보가 지난 총선 공천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후 다시 한번 총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4년간 발로 뛰면서 서민들을 만나 바닥을 다지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여성 후보자로서 섬세함을 갖춘 더불어민주당의 권향엽 예비후보를 만나 오는 4월 총선에 대한 각오를 들어봤다.(편집자 주)△ 4월 총선의 의미는 무엇이며, 후보로서 총선에 임하는 각오는?= 이번
광양시 광양읍 초남리 302번지 일원의 초남리 골짜기(멀구모퉁이)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빨치산과 군경간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곳이며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초남리는 초남마을과 현월마을이 있고 두 마을 사이에 멀구탱이라는 골짜기가 위치한다. 초남리 봉화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금광으로 유명한 초남광산이 있는데, 여수·순천10·19사건 이후 빨치산과 군경 사이에 빈번한 전투가 이곳에서 일어났다.1949년 9월 16일 새벽 2시쯤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경찰서와 관공서, 국군 제15연대 1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광양서국민학교를 공격한 시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노동과 인권, 민주주의 모두 후퇴국회에 가 제대로 역할 해 줄 후보로 당원들이 선택한 것정체성 지켜 온 진보당, 지방선거보다 더 나은 성과 기대 일찌감치 진보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확정된 유현주 예비후보는 광양지역에서는 진보정치의 간판이다. 광양시장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정치세력을 대표해 수차례 출마한 바 있는 유현주 예비후보는 그동안 한결같이 노동자, 농민, 서민들 곁을 지켜왔다. 진보당의 유현주 예비후보를 만나 오는 4월 총선에 대한 각오를 들어보았다.(편집자 주)△모든 후보들에게 묻는 공통질문인데, 이
광양시 광양읍 죽림리 57-8번지 일원의 솔티재(송치재)는 여순사건 기간 동안 전투와 민간인 집단 희생이 일어난 장소다.행정리상 솔티재(송치재)는 광양읍 죽림리 직동마을이지만 골약면과 경계에 위치한다.여순사건이 막 발발된 1948년 10월 22일 경, 마산에 주둔하던 제15연대가 광양으로 지원을 오던 중 솔티재 양쪽 야산에 매복해 있던 봉기군의 기습으로 연대장 최남근 등이 생포되고, 다수의 군인들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15연대의 광양 진입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주에 주둔하던 12연대를 투입하면서 진압에 나섰다. 봉기군 일부가 봉강면으
광양과 순천의 경계가 되는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산 302 일원은 ‘반송쟁이’라 불리는 ‘반송재 주령골 입구’로 여순사건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여순사건이 막 발발된 1948년 10월 20일, 이곳에서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좌익 혐의자들이 집단 학살됐다. 광양경찰서 경찰 1개 중대 병력이 여수 14연대 봉기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순천으로 출동했으나, 순천 생목리 고개에서 봉기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3~4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에 격분한 경찰들이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2∼826일대는 화신광장으로 광양의 근대사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공간이다. 현재 읍내리 광양역사문화관 앞쪽 삼진수도와 가교인력 사이로 들어가는 골목과 대덕유료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연결된 북쪽 상가 부지에 1,000여 평의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이 화신광장이었다.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광양지역의 공공 행사가 많이 열렸던 곳이었다.6·25가 끝나고 지자체가 돈이 부족해 1958년, 민간에 땅을 불하(拂下)하면서 상가 건물이 들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됐다.이 일대는 주요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다. 일제
광양시 광양읍 읍내리 227-1는 옛 광양경찰서가 있었던 자리로 여순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의 공간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광양경찰서가 문을 연 후 1999년 목성리 청사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현재는 광양매일시장 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이곳에서는 1945년 8월 16일 광양의 지도자들이 모여 해방 축하 군민대회를 준비하기도 했다.여순사건과 관련해서는 주요한 3번의 사건이 발생했다. 1차는 1948년 10월 20일 광양경찰서 경찰 1개 중대 병력이 여수 14연대 봉기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순천으로
광양시 광양읍 숲샘길 29에 소재한 광양서초등학교는 여순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의 공간이다.여수·순천10·19사건의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진주한 토벌군이 주로 이곳에 본부를 두고 백운산 지역에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5연대 2대대 7중대원 허모씨(당시 21세)는 광양서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백운산 토벌작전에 참여했다.허씨는 광양에서 “직접 봉기군 가담 혐의자를 잡아서 총살한 적이 있다”며, “총살 시 조사나 재판과정은 없었고, 연대장 지시를 받아 실행했다”고 진술했다. 1949년 9월 16일, 빨치산의 광양읍 습격 당시 광양서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9번지에 소재한 광양역사문화관은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시기 광양군청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이곳은 조선시대에 6방이 근무하던 작청(질청)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광양군청 건물로 신축됐다. 1981년에 광양군청이 칠성리로 옮겨가면서 광양읍사무소로 이용됐으며, 2010년에는 광양읍사무소도 칠성리로 옮겨갔고, 현재는 광양역사문화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9년 10월 12일자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44호로 지정됐다. 여수・순천10・19사건이 일어나고 광양군청 옆 광양읍사무소 건물을 민간에
광양 서천을 따라 성불계곡을 향해 오르다 보면 비봉산이 나오는데 이 비봉산 기슭 가장 안쪽에 상봉마을이 있다. 서천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과 어울리면서도 봉강면사무소, 봉강우체국, 봉강초등학교가 소재한 마을이기도 하다.■상봉과 봉계 유래상봉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㫆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광양현 며내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며내면 봉서촌(鳳棲村)지역이었으며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며내면 상봉리(上鳳里)라 하여 마을이름이 문헌상 처음으로 기록되어 전해진다.상봉마을은 당저(堂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