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마을은 봉강 조령리에 속해 하조마을 아래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정면으로는 형제의병장 묘역 및 쌍의사가 있는 신촌마을이 봉강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글을 많이 아는 지식인의 마을부암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旀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며내면(旀內面)에 속했고, 1872년 광양현 지도에 의하면 며내면 묵방리(墨方里)지역이었다.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봉강면 부암리(傅岩里)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에는 주변 여러 마을(里
통사마을은 황길역을 앞에 두고 통사저수지를 옆에 끼면서 그 뒤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구봉산이 마을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고 구봉산 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기동마을로 들어서는 갈림길에는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있다.■마을의 형성과 유래통사마을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하면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600년경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 지역이었으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에 속했다.통사마을은 각성촌으로 진주정씨(晉州鄭氏), 고령신씨(高靈申氏), 해주최씨(海州崔氏), 남양홍씨(
내금마을은 옥곡면과 진상면 경계에 있는 밤골재를 우회하는 고갯길을 뒤로하고 그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밤골재 경사면이 병풍을 치듯 감싸는 모습이 특징이다. 위치상으로는 진상면 외금마을과 상금마을 사이에 있으면서도 밤골재를 통하면 옥곡면과도 맞닿아 있다. ■금련촌 안쪽에 위치한 마을내금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상리(津上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금련촌(錦蓮村)지역이었다. 1912년(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진상면 내
신도마을은 서천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광양역을 정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의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을과 맞닿아 있는 서천변 둔치는 이용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신도마을의 유래신도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다. 1872년 광양현 지도에 의하면 현재의 도청마을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왜정시대 행정개편 후인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도 ‘신도’라는 이름은 문헌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를 참고하면 현
용지마을은 태인도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김양식과 미래 무형문화유산인 큰줄다리기로 유명하다. 마을회관에서 관광객을 위한 김양식 및 용지큰줄다리기 체험을 경험할 수 있고, 골목길 구석구석에 용지큰줄다리 벽화가 꾸며져 있는 이유다. ■용이 머리를 내밀고 나왔다는 전설용지마을은 1861년에 펴낸 사료인 명세궁 수세절목에 의하면 하동고지(河東古池)지역으로 추정된다. 하동고지(河東古池)라고 부른 유래는 경남 하동을 향해 불쑥 뻗어 나온 땅이란 뜻으로 추정되며, 용지(龍址)란 옛날 마을 앞 개천둠병에서 용(龍)이 머리를 내밀고 나왔다는 전설에
해두마을은 세승교차로에서 세승 마을을 지나 신두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나온다.위치상으로 신두마을 아래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순천시 해룡면 봉 서마을과 맞닿아 있어 광양과 순천의 경계가 된다.■게물똠의 유래해두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 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인덕면 (仁德面)지역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인덕면 신풍촌(新豊 村) 지역이었다.1912년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의하면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 전까지는 이 지역이 인덕면 신풍리 지역이었는데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
입암마을은 진상면 청암리의 한 마 을로 목과마을을 지나 진월면 차사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건너기 전에 나온다.마을 동남쪽에서 자리한 이 고개는 ‘배암재’라고 불리며, 진월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소개하는 유래비가 있다.■우뚝 선 바위입암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 面) 진상리(津上里) 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다.1912년 지방 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의하면 광양군 진상면 입암리(立岩 里)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원리(桃源里), 중양리(中 陽里), 청룡리(靑龍里),
삼성(三城)마을은 세풍리 해창(海 倉) 남쪽에 자리한 세 개의 섬을 묶어 형성된 마을이다.1957년 간척사업이 완료되어 해창, 세승 등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생겼고, 이때 삼성마을도 형성됐다. 그렇지만, 이 마을은 세풍산단 조성 예 정지로 이미 일부 마을은 사라졌으 며, 남아있는 마을도 조만간 그 흔적 을 찾기 어렵게 될 것으로 보인다.■삼성마을의 형성과 유래삼성마을은 본래 세 개의 섬으로 이뤄진 마을로 유자섬(柚子島), 대섬 (竹島), 뱀섬(蛇島)을 묶어 삼성(三 城)이라고 이름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1957년 정부 보조로 세풍
사동마을은 ‘뱀골’이라고 불리던 마을로 학동(學洞)이라고도 했다.진월면에서 진상면 청암리 입암마 을로 가는 고갯길을 ‘배암재’라고 부르는데, 사동마을은 이 배암재 바로 밑에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에는 이 배암재 고갯길이 뱀이 기어가는 것 처럼 꾸불꾸불했다고 한다.■마을형성 및 지명유래 사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 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고,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진하면 학동리(學洞里)로 되어 있다.약 470년 전 진주정씨(晋州鄭氏) 가 처음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
하운마을은 백운산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로 중흥사로 이어지는 상 운마을과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하고 있다. 마을 정면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그 앞으로 옥룡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마을에서 봉강면 부저리로 넘어가 는 산고개가 있는데 ‘가목쟁이’라고 주민들은 부른다.■아랫굴물하운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 面) 옥룡리(玉龍里)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룡면 에 속했다. 1786년경 전주이씨 이선두(李善 斗)라는 사람이 진월면 사동마을에 살다가 부모를 여의고 생활이 어렵 게 되자 형제들이 흩어지면서 이곳 에 입
옥곡면에서 진상면으로 가다보면 굽이굽이 산등성이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옥곡면과 진상면 경계에 있는 밤골산과 수달산을 우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상금마을은 이 산등성이 길을 넘어 평지에 이를 때 나오는 마을로 수달 산을 뒤로하고 옥곡면과 맞닿아 있다. 마을 앞으로는 외금, 내금, 이천 에 걸쳐있는 ‘대언평’이라는 큰 들이 펼쳐져 있다.■금련촌(錦蓮村)의 가장 위쪽 상금(上錦)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 면(東面) 진상리(津上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 의하면 진 상면 금련촌(錦蓮
마동마을은 진월초등학교 마룡분 교장 바로 인근에 자리한 마을로 사 동마을과 방죽마을 사이에 있다.마 을은 진월면 마룡리에 속하여 행정 리상 마동(馬洞)이라 불리며 옛날 마 을 앞에 개(浦)가 있었다고 한다.■말개·몰개의 유래마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 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 (津下面)에 속했다.1789년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마 포촌(馬浦村)이라 했다. 마동마을은 약 470년 전 밀양박씨 (密陽朴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마동 본래 이름은 ‘몰개’ 또는
회암마을은 덕례리 서산 언저리에 자리한 마을로 오성아파트 인근 일 대를 말한다. 오성아파트 앞 삼거리 를 회암삼거리라 부르는데 예전부터 이 언덕 부근을 회암이라 불렀다고 한다.현재 회암지역은 아파트를 비 롯한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주민 들은 광양장례식장 인근으로 이전하 기도 했다.■고암 바위회암마을은 석검, 석촉,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지역으로 마을연혁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 라간다.그러나 당시 마을에 대한 자 세한 연혁은 알 수 없고 1600년경에 는 이 마을이 광양현 남면(南面) 인 덕리(仁德里)지역인 것으로
무선마을은 광양보건대학교 뒤편 에 자리한 옥녀봉 산비탈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 세풍리 세승마을로 이 어지는 산길이 나오는데, 이 길은 ‘무 선잇재’ 또는 ‘무선재’라고 불린다.마을은 한때 광양보건대, 한려대학 교가 들어서 있다는 이유에서 대학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신선이 춤을 추는 마을무선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 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에는 인덕면 지역 에 속했다.1789년 호구총수에 인덕면 무선 촌(舞仙村)이라 하여 국가주요문헌 에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났다.무선마을은 김해김씨(金海
탄치마을은 불암산을 뒷배경 삼아 비촌 마을 동쪽에 자리한 마을로 진 상면에서 하동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한다.비촌으로 오르는 고개를 중심으로 상탄치, 하탄치로 나뉘며, 상탄치 마을 앞으로는 백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숯골이라 불리던 마을탄치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 面) 진상리(津上里) 지역으로 추정되 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 에 속했다.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진상면 암치(巖峙)라 했고,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진상면 탄 치리(炭峙里)로 표기되었는데 1914 년 왜정시대 행정구역개편 시 탄치 리와
신촌마을은 광양읍 해창마을에서 광양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초남리와 바다를 사이에 둔 세풍만 일원에 진행된 세풍간척사업으로 이 지역에 새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새로운 터에 자리한 마을신촌마을은 본래 인덕면(仁德面)에 속한 마을로 해창(海倉) 북쪽에 새로 된 마을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1957년 정부보조로 세풍간척사업이 완공되면서 해창, 세승 등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형성되었는데 그때 길옆 산자락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촌(新村)이라는 이름 유래는 ‘새터
해창마을은 세풍리의 한 마을로 부흥마을과 신촌마을 사이에 자리해 있다. 세풍 간척지에서의 우수한 쌀 재배로 마을에는 정미소가 여러 군데 있으며, 한때 광양우산농악과 함께 광양의 양대 농악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해창매구가 있다.■조창해창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 지역으로 추정된다. 1700년 초기 이후에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고 1789년에는 인덕면 해창촌(海倉村)이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났다. 적어도 이때부터 이곳이 세곡을 보관하고 운반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1912년 행정구역 개편에
청도마을은 진상면 청암리에 속한 마을로 지원리의 지랑마을과 청암리의 목과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다. 마을은 도원(桃源)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청룡(靑龍), 오른쪽에는 중양(中梁) 3개의 작은 마을로 펼쳐져 있고 이들이 합쳐지면서 하나의 마을 이름이 형성됐다. 현재 청도마을을 알리는 마을 표지석은 마을의 중심이 되는 도원 입구에 마련돼 있다.■도원·청룡·중양청도(靑桃)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상리(津上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도원촌(桃源村)지역이었다. 도원, 청
명암마을은 순천에서 내려오는 구상천과 봉강면에서 내려오는 서천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자리한 마을로 광양고등학교를 마주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광양읍과 가까워도 행정상으로 봉강면 석사리에 속해있으며, 호남지역 최초의 사직단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진 마을이다.■울바구명암마을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어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그 당시 마을 연역은 알 수 없으며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명암마을은 1600년경에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㫆內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선포마을은 망덕리 천왕산 언저리에 자리한 마을로 광영동을 정면에 마주하고 있다. 마을 앞 갯벌은 갈대와 어우러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재첩, 백합, 모시조개가 마을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신선이 살기에 알맞은 마을선포마을은 약 270년 전에 진씨(陳氏) 성을 가진 이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으며, 그 뒤 성주배씨(星州裵氏)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본래 섬포(蟾浦)라 했는데 두꺼비와 관련 있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헌상 기록되어 전하는 내역을 참고하면 섬포(蟾浦)라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