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승마을은 광양읍 덕례리에서 세풍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으면 나오는 세승교차로의 우측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 도로는 신두마을 및 해두마을은 물론 순천 신대지구와도 연결되어 있어 지척을 이루며 마을 뒤로는 금슬봉을 등지고 덕례리 무선마을과 인접해 있다.■마을 유래세승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인덕면 세승촌(細繩村)으로,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인덕면 세승리(細升里)라 했다. 세승마을은 약 420년 전에 청주한씨(淸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른 후의 시설물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여수세계박람회장의 사후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것과 관련, 의미있는 작업이다.우리나라는 88서울올림픽을 비롯해 1993년의 대전세계박람회,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다.그리고,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행사를 치른 후 국제행사에 사용된 시설물들은 사후 지방자치단체에 이관되거나 시설물의 특성에 맞춰 별도 조직을 통해 유지, 관리하고 있다.여수세계박람회에 앞서 박람
강정마을은 광양경찰서 맞은편 익신리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용강정수장이 있는 자그마한 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발전했는데 마을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집 등이 철거되어 현재 마을 터는 주차장 부지로 활용되고 있다.■역사속의 강정마을강정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사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사곡면(沙谷面) 강정촌(江亭村)이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났다.강정마을은 언제 어느 성씨에 의해 마을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마
여수광양항만공사가 여수세게박람회장을 이수해 개발할 경우 그 방식은 항만재개발의 형식을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수세계박람회장이 있던 부지는 원래 여수신항이 있던 곳이었다.여전히 박람회장 인근에는 여수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카페리부두가 위운영되고 있다. 항만재개발을 통한 문화관광자원 개발은 국내 항만공사들이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사업이다.대표적인 곳이 부산항만공사의 북항재개발사업이다. 부산도심에 위치한 북항은 부산신항만 건설로 그 기능을 신항만에 이관하면서 이곳에 대한 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부산항은 1876년 무역항인 부산포로
산본마을은 옥룡면 산남리에 속한 마을로 월파마을과 남정마을 사이에 있다. 이 마을의 표지석은 마을의 시작과 끝을 알리며 큰 길가를 기준으로 두 곳에 나눠 있는데, 하나는 월파마을을 지나 큰 정자나무가 있는 길가 오른편에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재동교 가기 전 마을 뒷길로 들어서는 진입로 모퉁이에 있다.■산밑에 형성된 마을산본마을은 청동기시대 사람의 시체를 매장했던 지석묘와 그 당시 생활 흔적인 무문토기, 경질토기편들이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연혁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600년경에는 광양현 북면(北面) 옥룡리(玉龍
여수광양항만공사는 항만공사법에 따라 설립됐다. 이 법에서는 항만공사의 사업으로 △항만시설의 신설ㆍ개축ㆍ유지ㆍ보수 및 준설 등에 관한 공사의 시행 및 항만의 경비ㆍ보안ㆍ화물관리ㆍ여객터미널 등 항만의 관리ㆍ운영에 관한 사업, △항만배후단지개발사업, △항만재개발사업, △마리나항만시설의 조성 및 관리ㆍ운영에 관한 사업, △물류시설운영업, △항만의 조성 및 관리ㆍ운영과 관련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위탁받은 사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또, △공사가 관리하는 부지 및 시설을 활용한 신ㆍ재생에너지 설비의 설치 및 관리ㆍ운영에 관한 사업,
구룡마을은 안망덕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장재마을과 작은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이 산등성이는 장재로 가는 길 위쪽에 볼록하게 나온 부분으로 ‘마가리’라고 부르는데 구룡에서 이를 지나면 내망·장재마을이 곧바로 나온다. ■인재가 많이 배출된 마을구룡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다.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진하면 구룡리(九龍里)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하면(津下面)과 월포면(月浦面)이 통합되어 진월면(津月面)이
올림픽과 월드컵, 박람회와 같은 국제적인 행사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치활동을 벌이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그렇지만, 행사가 끝난 후 이러한 메가 이벤트에 사용된 시설물의 관리는 어떻게 되는가?이런 대규모 국제 이벤트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의 시설물 활용방안은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숙제가 되고 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행사 중 대한민국은 월드컵과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그리고 엑스포까지 개최한 나라다. 이러한 메머드급 행사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치를 만한 국력을 과시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세계인의 주
신두마을은 광양읍 세풍리에 속한 마을로 세승마을과 해두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순천시 해룡면 신대리 봉서마을과도 인접해 있다. 세풍이라는 지명이 세승마을의 앞글자인 ‘세’와 신두마을의 옛 이름인 신풍마을의 ‘풍’자를 조합해서 붙여진 이름이기에 신두마을은 세풍의 대표 마을이라 하겠다.■신풍을 기리다신두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 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인덕면 신풍촌(新豊村)이었다.마을이 처음 형성하게 된 것은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구동마을은 진월면 신구리에 위치한 마을로 앞으로는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뒤로는 삼봉산과 깃대봉을 경계로 진상면 지원리와 인접해 있다. 거리상으로는 진월 신기마을과 추동마을이 가까워 세 마을이 삼각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듯하며, 마을 입구 진입로 바로 위에는 광양·진주를 잇는 국도 2호선이 지나고 있다.■굴레 같은 포구를 지녔던 마을구동마을은 국가주요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구량포소(九良浦所)라는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어 고려(918~1392) 또는 그 이전에 이미
부흥마을은 세풍고가 아래에 있는 세승교차로 바로 우측 변에 위치한 마을로 세풍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내려골((內閭)이라는 자연부락이 먼저 형성되었다가 1957년 세풍간척지 조성사업 후 신작로를 따라 부흥마을이 새로 생겼다. 현재 부흥마을은 광양시 광양읍 세풍리(법정리) 행정리상 부흥(復興)이라 하며 부흥(富興)과 내려(內閭)를 포함한다.■다시 부흥하는 마을부흥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 는 인덕면(仁德面)에 속했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인덕면의 도계촌
재동마을은 광양읍에서 옥룡면사무소 방향으로 향하다 옥룡면 솔밭공원 전에 있는 재동교를 통해 동천을 건너 조금만 더 오르면 나오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당산나무가 있고, 그 앞으로 20면 이상으로 조성된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마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재궁과 동전재동(才東)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옥룡리(玉龍里)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룡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옥룡면 동전촌(東田村)지역이었다.이 마을은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본 마을과 동전마을을 통
내망마을은 망덕산 문턱에 자리한 마을로 장재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진월IC가 마을정면에 있고 망덕산이 마을 뒤에서 수호신처럼 마을을 보호한다. 내망에서 태인도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망덕산과 천왕산을 잇는 출렁다리가 보인다.■명당의 보호아래 있는 마을내망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진하면(津下面)에 속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덕망촌(德望村) 지역이었으며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망촌(望村)지역으로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들이 모슬포주민들을 강제 동원시켜 세계2차대전 전쟁을 위한 비행기 격납고, 고사포진지, 지하벙커 등을 만들도록 했으며, 제주4.3사건으로 마을이 모두 불타 주민들이 야산에서 생활하거나 해변으로 흩어졌고 대규모 민간학살이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제주는 제주의 다크투어리즘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군사기지화를 위한 군사시설과 4.3사건의 잔혹한 현장을 포함한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제주의 상흔은 제주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대규모 민간인학살 현장 북촌리
외금마을은 옥곡면과 진상면 경계에 위치한 마을로 잼비산 일원의 옥곡 금촌마을과 진상 내금마을 사이에 있다. 옥곡에서 진상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밤골재 정상에서 외금마을로 들어설 수 있는 길이 나 있지만 이 길은 마을 뒤편으로 연결된다. 마을 정면으로 바로 가기 위해서는 옥곡에서 진월로 가는 국도에서 금촌마을을 지나면 나오는 버스정류소의 옆길을 이용하면 된다.■금촌(錦村) 바깥쪽 마을외금마을은 광양현 동면(東面) 진상리(津上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금련촌(錦蓮村)
4.3사건 전개과정 한눈에 보여주는 4.3평화공원 등 스템프 투어로 역사의 진실 알리려 노력 여순사건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있었던 제주4.3사건을 알아야 한다.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한 게 여순사건이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은 이 보다 앞선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억만마을은 마로산 동쪽 앞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사곡 사라실예술촌(구, 사곡초등학교)과 맞닿아 있다. 마을 앞으로는 억만천이 흐리고 억만교를 통해 마을로 들어서면 약 300년 된 마을 보호수인 팽나무가 그 위세를 뽐낸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로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어마정의 유래억만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사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사곡면(紗谷面) 본정촌(本井村)지역으로 어마정(禦馬亭)이라 했다.억만마을을 어마정(禦
윤동주 기념관, 정병욱 선생과의 인연 자세히 소개…망덕포구 정병욱 생가 활용 방향 재검토 필요 망덕포구 무접섬과 그 인근에는 윤동주 쉼터와 윤동주 시인의 시가 적혀있는 윤동주 시(詩)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 윤동주 관련 콘텐츠가 조성된 것은 망덕에 소재한 정병욱 가옥에서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광양시는 ‘민족시인’ 윤동주라는 문화 브랜드를 선점하고 관광과도 연계시키겠다는 방침이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을 잡은 것은 아닌지
제주 4.3항쟁 진압명령 거부한 좌익 군인들의 봉기… 반군 토벌 과정에서 숱한 민간인 군경에 의해 학살 74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한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군인들은 다음 날인 20일,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곧이어 광양을 포함한 전남 동부지역까지 점령해 나갔다. 이에 전라남도 동부지역에 그 여파가 미쳤다. 실제로 여수, 순천은 명백히 14연대 군인들이 점령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거의 지나가는 수준이었고, 대신 미군정
기동마을은 성황동을 지나 황길역으로 향하다 보면 통사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는 벌등마을과 갈림길 좌측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본 마을을 합친 마을이다. 벌등마을과 통사마을의 경계지역이 되는 갈림길을 구문장이라고 부르며, 기동마을 입구까지는 마을버스가 들어온다.■기동과 벌등 기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骨若面) 지역에 속했다. 학자들 간에는 마을 이름인 기동(基洞)과 이곳 지형적 여건으로 보아 고려 또는 그 이전에 특수행정구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