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진월 IC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망덕산이 나온다. 장재마을은 이 망덕산을 앞에 두고 뒤로는 천왕산과 맞닿아 있다. 호남정맥을 잇는 두 산이 이 마을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또 마을 앞에는 논이 펼쳐져 있으면서도 섬진강의 물길이 바다와 접하는 망덕포구와 가까워 농·어업 모두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가졌다. ■길게 뻗은 호남정맥과 옥녀봉장재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장지촌(莊峙村)이라 표기되어 있
인서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 는데 광양읍성과 관련이 깊다.위치상으로는 인동숲을 포함한 광 양동초등학교 부근이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남문외촌 (南門外村)과 둔촌(屯村)지역으로 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광양읍성의 남문 바로 앞에 위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성 밖 서쪽에 위치한 마을 광양에도 읍성은 존재했다. 읍성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펼치기 위해 1415년에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 다. 규모는 둘레 549m에 높
용소마을은 진월면 마룡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새로 개통된 국도 2호선 과 맞닿아 있다. 위치상으로는 진상 면과 더 가깝지만, 마을 바로 앞에 있 는 마룡교차로를 통하면 옥곡 및 광 영이 10분 내 거리로 도시로의 접근 이 보다 용이하다. 마을은 30호 남짓한 가구가 사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마을 입구 의 소나무 숲이 한껏 뽐을 내고, 그 옆에 진월119지역대와 노경회 노인 복지센터가 자리하고 있어 마을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용소의 유래용소(龍沼)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 면(東面) 진하리(津下里)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1700
황곡마을은 현재 개발이 한창인 황금지구 내 위치한 마을로 하포삼거리에서 구봉산 방향으로 들어서 평촌마을을 지나면 나온다. 마을은 구봉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다. 마을에서도 광양항이 바로 정면에 보일 정도로 경치도 훌륭하다. ■ 누룬실황곡마을은 예부터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전해오는 광양 12실(室) 중의 하나로 ‘누룬실’이라 했다. 누룬실의 유래는 이 지역이 봉화산의 광맥(광구)에 속한 지역이라 예부터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을 찾았고, 이 때문에 ‘사금이 많이 나는 고장’
외산마을은 백계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마을의 왼편에는 도선국사마을이, 오른편에는 백계산 동백림이 조성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재 외산(外山)지역은 옛 광대촌(光大村. 백계리)지역이었던 옥룡사지까지 포함한다.■놋그릇을 만드는 곳외산(外山)마을은 왜정시대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옥룡면 하산리(下山里) 백계리(白鷄里)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추동리·상산리·중산리와 병합하여 추산리(秋山里) 지역으로 편입됐다.이 마을은 1912년 이전까지 하산(下山)마을이라 했는데 마을 사람
선동마을은 백운산 고로쇠약수제 단이 있는 동동마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치상으로 바로 옆 마을이기 도 하고 한때 선동마을은 행정상으 로 동동마을에 속해 있다가 2007년 에 분리되어 독립마을이 됐다. 동동 마을에서 선동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백운산 고로쇠약수제단을 지나 선동 교를 건너서야만 들어설 수 있기에 두 마을의 분리는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마을회관도 동동마을에서 분 리된 지 12년 만에 새로 건립됐다.■선인(仙人)이 사는 마을선동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 편 이전에 옥룡면 선동리(仙洞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
다사마을은 다압중학교가 소재해 있는 마을로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백운산이 감싸고 있다. 사시사철 백운산의 푸르름과 섬진강의 맑은 물길이 어우러지고 있는 가운데 봄이면 매화꽃이 만발하면서 마을 어디에서든 향기로운 매화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위치로는 매화 축제가 열리는 섬진마을과 맞닿아 있다.■선비가 많이 있는 마을다사마을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조사된 바 있으며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이 마을에 다사천소(多沙川所)란 특수행정구역이 있었으므로 마을 역사는 아주 깊다고 하겠다. 그 당시 경남 하동군을 한다사현(韓多沙懸
원적마을은 광양읍에서 옥곡면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한 마을로 남해고속도로와 관련이 깊다. 이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남해고속도로 아래의 터널을 지나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마을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조사된 지역으로 알려지는데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이 지석묘들이 발견돼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지역임을 알리고 있다.■으뜸이 되는 마을원적마을은 문헌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1600년경부터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앞 지석묘와 출토유물로 보아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전 300년
원동마을은 광양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섬진교와 접해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때 주막거리로 불리었는데, 하동에 장이 서는 날이면 진상면 사람들이 나뭇짐이나 장삿거리를 지고 넘어와 이 마을의 주막에서 술을 먹고 쉬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지금도 이 마을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임에 틀림없다.■평화를 여는 마을원동마을은 1750년경 인동정씨(仁同丁氏)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나 이보다 훨씬 먼저 이곳에 섬진원(蟾津院)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실제 설촌연대는 그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원동(院洞)이름 역시 섬진
동동마을은 백운산 자락의 남쪽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로 백운산 노랭이봉을 등지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높고 낮은 산세가 좌우로 감싸고 있어 따뜻함을 자아내고 있으며 백운산고로쇠약수제단과 동곡보건지소가 있다.■송천사지동동마을은 백운산 노랭이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450년 전 이천서씨(李川徐氏)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며, 여산송씨·김해김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도 전한다. 동동마을의 처음 이름은 마을형국이 학(鶴)의 모습이라 하여 학동(鶴洞)이라 하였는데 그 후 이곳 지역이 절터 주변지역으로 변모되면서 이 마을에 위치한
송현마을은 대리마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위쪽에는 송현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송금방천으로 향하는 아랫마을에는 소나무가 정갈한 자락섬이 있어 그 모습이 남다르다.■소나무 고개송현마을은 고려 또는 그 이전에는 당시 특수행정구역인 문현소(蚊峴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789년쯤에는 월송우촌(月松宇村)이란 지역이었으며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월포면 구송리(舊松里)에 속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월면이
백양마을은 옥곡 대죽마을과 수평마을을 잇는 대치길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수평천이 흐르고 뒤로는 크고 작은 동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아늑함이 묻어난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는 사계절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300년 된 보호수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다.■두 개의 마을이름 유래백양마을은 1480년경 해주정씨(海州鄭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하는데, 마을 입구 언덕 주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주먹도끼가 출토돼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 이곳 부근에서 사람이 살았을
예구(禮求)마을은 이름에서부터 예절이 묻어나는 마을이다. 예절을 뜻하는 ‘예(禮)’를 마을 이름에 사용해 ‘예절을 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다. 그만큼 이 마을이 오래전부터 예를 중시했으며 역사 또한 깊다 하겠다.현재 예구마을은 LF스퀘어와 광양 운전면허시험장 건너편에 위치하여 마을의 대부분이 현대화되어 가고 있지만 마을 한편은 아직도 골목길 등 옛 모습이 남아있다. ■목마른 꿩의 모습예구마을은 마을입구 도로변에 11기의 지석묘, 오성아파트 단지공원 내 13기의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 사람의 시체를 매장했던 고인돌이 집단으로 위치
이정마을은 진월면 선소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시골의 전형적인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가를 끼고 있으면서 지금의 마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마을의 모습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겨운 옛 시골의 모습이 자연과 함께 어울려 있다.■이도촌(狸島村)이정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 진하리 지역으로 추정된다.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에는 진하면 이도촌(狸島村)이라 했다.이도촌이라고 했던 이유는 옛날 이 마을이 갯가에 위치하였는데 이정마을과
오추마을은 통일신라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로 역사가 깊다. 지금은 진월면 오사리 제방 안쪽에 있는 마을의 모습이지만 옛날에는 섬진강을 바로 끼고 있었다. 갯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하면서 군사, 행정, 종교, 교육 측면에서 다른 어떤 마을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다.■ 군사·행정·종교·교육 측면 오랜 역사 간직오추마을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국가주요문헌에 오정소(烏頂所)라 기록되어 전하는데 서기 600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은 백제 사비(泗沘)시대의 37군 중 ‘오추골’로 삽평군 마로현에 속하였으며
광양읍에서 옥곡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에 터널을 지나야만 연결되는 선유마을이 나온다. 선유마을은 뒤편에 광양 산행으로 유명한 국사봉이 있어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듯 따뜻함을 자아낸다. 마을 안쪽 도로변에 위치한 약 200년 된 소나무도 이 마을의 자랑거리다.■ 체(篩)를 만들었던 고장선유마을은 옥곡면 선유리에 속한 마을로 선유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당시 상선리(上仙里), 하선리(下仙里), 오류리(五柳里)를 병합할 때 상선의 ‘선’과 오류의 ‘류’를 따서 선유리(仙柳里)라 한 것이다. 선유마을도 이 선
목과마을은 이름에서부터 모과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모과가 나무에 달리는 참외 비슷한 열매라 하여 목과(木瓜) 또는 목과(木果)라고도 쓰기 때문이다. 진상면 청도마을과 입암마을 사이에 위치한 목과마을이 어떻게 모과와 연관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모과나무골목과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 진상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진상면 청암리 목과리(木果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났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원리, 중
금동마을은 진월면에 속한 자연마을로 송현마을과 구동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조용한 시골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마을 이름에서는 평범함을 느끼지 못한다. 마을이름에서 거문고 금(琴)’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특별해 보인다. 마을 동쪽에 흐르는 섬진강이 거금고 가락에 흥을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거문고 금(琴)’자 사용 이유 금동(琴洞)마을은 고려 또는 그 이전에 거을망포(巨乙亡浦)지역으로 추정되며 1600년 경에는 광양현 동면 월포면(月浦面)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현월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 사라곡리 지역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현재는 광양읍 초남리에 속하며 초남마을과 맞닿아 있으며, 재첩이 서식하기 좋았던 마을로 옛날 광양광산이 있었다.■재첩이 서식하기 좋은 마을현월마을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태서가 약 340년 전 처음 입촌하였고 뒤를 이어 고령신씨, 영광김씨, 제주고씨 순으로 입촌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의 모습은 양쪽에 산을 끼고 골짜기에 마을이 이루어져 있어 지형적으로 초생달 형국이다. 마을 뒷산이 ‘하늘의 달을 매달아 놓은 곳’이란 뜻으로 ‘매달 현(懸), 달 월(月)’의 글자를
옥룡면 옥동마을은 2008년까지 옥룡중학교가 위치해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는 폐교되어 옥룡중학교는 사라졌지만 광양햇살학교가 2022년 3월에 개교하기 위해 한창 공사 중에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옥동교가 있으며, 옥동교 입구에는 마을 이정표와 함께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 이현일 선생의 마지막 유배지라는 표지석이 마련돼 있다.■ 안으로 들어오는 마을옥동마을은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700년경 이춘방, 이문방 형제가 마을입구로부터 안쪽으로 800m 지점에 터를 잡고 살아오다 타 지역으로 이주하고 그 후 하동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