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 국가산업단지가 입지해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고 있는 광양만은 400여년 전 한중일 동북아 3국의 해군력이 격돌한 역사의 현장이자, 호국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7년에 걸친 임진,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광양만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충무공의 정신이 깃든 광양만의 역사적 가치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광양만신문은 창간 12주년을 맞아 광양만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순신 리더십 전문가인 김영이 전 국방대 교수의 기고를 연재한다.

김영이 전 국방대 교수는 광양시 태인동 출신으로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으며, 국방대학교 군 전임교수를 역임했다.

- 편집자 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 정유 7년 왜란을 맞아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불사르고 나라를 구한 구국의 성웅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 임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23전 23승을 거둔 세계 해전 사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임전무패(臨戰無敗)의 기록을 남긴 전설적 명장이다.

장군이 격전의 소용돌이 속에 스스로를 던지고 나라를 구한 그 역사 현장이 바로 광양만이다.

“충무공이 광양만의 해룡이 되어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고 하시던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군이 왜적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고 장렬히 전사한 마지막 전투를 역사는 노량해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이 해전은 광양 앞바다의 송도와 장도(구 광양군 골약면) 그리고 순천 예교 일원에서 전개된 왜교 공방전으로 부터 시작되어 노량해협과 관음포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광양만 해전으로 통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광양만 일원을 내려다보면 북으로는 백운산과 그 자락들이 포란하듯 광양과 그 앞바다를 품었고 서남쪽으로는 순천과 여수반도가, 동쪽으로는 남해가 날개처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광양만의 젓줄인 섬진강은 남원과 곡성, 구례와 광양 하동을 휘감으며 강 하구에 이르러 장판교의 장비(張飛)처럼 버티고 있는 배알도와 마주친다. 이곳에서 섬진강 물줄기는 몇 갈래로 나누어 광양만 일원으로 흘러들어 바다와 한 몸이 된다.

그중 가장 큰 물줄기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지우며 광양의 태인도와 하동의 갈사도 사이를 흘러 묘도 앞에 이른다. 다른 한 줄기는 태인도와 금호도 사이를 지나면서 깊은 물골을 만들어 놓고 묘도 앞바다에서 다시 본류와 재회한다. 그리고 다른 한 지류는 경남 하동의 고포와 갈사도 사이에 있는 윤두목을 지나 노량 해협으로 흘러들었는데 지금은 간척으로 물길이 막혔다. 한편 백운산에서 발원한 수어천은 옥곡의 광포 앞을 지나 골약의 와우와 하포를 휘돌아 장도와 송도에서 옥룡천 과 어우러져 섬진강과 다시 만난다.

섬진강과 수어천, 그리고 옥룡천의 물줄기가 흘러드는 이 바다와 그곳을 면한 고을들, 그리고 여기에 세워진 굴지의 산업기지들을 통칭 광양만권이라고 한다.

지금은 준설과 매립, 연륙과 간척 등으로 지형이 크게 변해 버렸고 광양사람 하동사람, 여수사람 남해사람들이 어우러져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광양만의 개펄은 연신 매립되어 공단이 들어서고 있다.

노량해전이던 광양만해전이던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가들의 몫일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광양만을 가로지르는 이순신 대교를 바라보면서 그 전투 현장의 작은 섬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어떤 소회에 젖어본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강의 했던 경험을 되살려 사백여년 전 그날, 이순신 휘하였던 광양수군의 용맹스러운 활약상을 빈약하지만 몇몇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면서 광양만해전의 전후 배경과 경과, 그리고 마지막 관음포 전투의 현장 등 광양만 전투 전반을 다시 기사화 해 본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