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신묘년 2월 13일이었다. 이 시점은 왜의 조선 침략 징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조정은 애써 이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미흡하기는 했지만 유성룡과 같은 몇몇 현신들의 주도로 일부 변방의 방비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바로 이순신 장군도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 현감에서 일약 정3품직인 전라좌수사에 봉해진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던가, 서애(西厓)의 혜안과 하늘의 도움이 만들어낸 구국의 인사였다.

전라좌수사로 취임한 이순신 장군은 오늘의 상황이 태풍전야임을 직감하고 곧 바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관할 5관 5포를 순시하면서 군비 점검과 함께 구체적인 전력보완을 지시한다. 아마도 전선 건조와 병원 충당, 군량확보 등과 함께 강한 군사훈련도 주문했을 것이다. 광양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쟁 대비에 동분서주하는 현감 이하 광양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광양 현감은 어영담이었다. 어영담 현감은 이순신 장군이 좌수사로 부임한 비슷한 시기인 신묘년 3월초에 광양에 부임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좌수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은 전쟁대비에 힘을 같이 한 것이다.

어영담 현감에 대한 기록은 상상외로 제한적이다. 최근 광양시가 어현감의 현창(顯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직 흡족한 결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여기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만 약술한다.

우선 어영담에 대한 존칭을 현감으로 할 것인지 조방장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장군으로 할 것인지가 규정되어야 할 것 같다. 현감이나 조방장은 공이 봉직한 직책이기 때문에 당연한 호칭이다. 다만 조방장은 병사나 수사 등 주요 지휘관이 휘하 장령이나 일반 군관 중에서 임명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장군으로 호칭하기에는 무리다. 다만 최근 광양시 현창사업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후 논공행상에서 선무공신에 책록 되지는 못했으나 정3품 통정대부로 추증된 것으로 되어있고, 함종 어씨 세보에도 장군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당상관(堂上官)을 장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영담 현감의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1532년 경상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본래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담략이 뛰어났으며 무예도 출중하여 무과에 등제하기 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있는 여러 진관의 막하에 군관으로 특채되어 활약했으며,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치는데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일찍이 전라좌수사 관할 여도 만호를 역임하기도 했다.

1564년 식년무과에 급제한 장군은 무과 급제전의 경력을 인정받아 바로 평안도 강계 고산리 첨사를 지냈고, 그 뒤 사천, 고령, 무장(고창)현감 등을 거쳐 1591년 3월 광양현감에 부임했다.

어영담 장군은 영호남 일대 각 진의 군관과 해안에 접한 여러 고을의 장령을 두루 역임했기 때문에 연안의 지세와 물길에 밝았고 왜구의 속성과 전술도 꿰뚫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고흥 땅 발포에서 만호로 근무한 적이 있지만 바다와 해전, 특히 경상도 연안의 수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양현감 어영담은 임진란 초기 이순신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어 현감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함대의 선봉을 자청(此則小將當之)했고 중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초전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임진년 5월 4일 1차 출정시 중부장으로 출전하여 옥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어 합포(마산)와 적진포(통영 적덕동)에서도 연승하는 실로 임진왜란 첫 승리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2차 출정에도 중부장으로 참전하여 당포등지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3차 출정 때도 변함없이 중부장을 맡아 청사에 빛나는 한산해전의 대승을 거두는 주역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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