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592년 임진년 4월 14일, 일본 침략군의 부산포 상륙을 시작으로 조선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대비하지 못한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개전으로부터 불과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6월 중순 평양도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왜군의 북상은 파죽지세였다.

4월 30일 피난길에 올라 의주까지 몽진(蒙塵)한 선조는 나라를 지킬 생각보다는 유사시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에 내부할 궁리에 몰두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군주나 지도자를 둔 백성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평안도와 호남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는 적에게 유린당했고 함경도로 피난한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마저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국운은 풍전 등화였다.

바로 이때 쓰러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로세운 구국의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 수군들은 임진왜란을 맞아 영호남 일대의 바다에서 연전연승하여 제해권을 완전 장악,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에 쐐기를 박았다. 특히 영남과 호남, 그리고 충청 연안을 통해 육군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려는 전략적 기도를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왜군의 지상전투에 제동을 걸었고 나아가 전세 역전의 일대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전라좌수사 휘하 광양현감 어영담이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기록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것은 비록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바로 어 현감 휘하의 광양 수군들의 활약상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때를 같이하여 경향각지에서 의병과 승군이 봉기, 왜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고 명나라의 구원병까지 내원하자 전세는 급변했다. 서울과 평양,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왜군은 남쪽으로 밀려 영호남 해안지방에 축성을 하는 한편, 명군과의 화평교섭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는 소극적 방어전술을 구사하면서 역공을 위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계획한 역공은 바로 정유재란이다. 정유재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한 재침의 승산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간계를 꾸민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간계였음에도 김응서는 중요한 정보나 얻은 냥 도원수 권율장군에게 보고했고, 도원수 또한 심층 분석도 없이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선조와 조정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이순신 장군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도원수 권율 장군이 직접 한산도 통제영까지 달려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이 분명한 간계임을 직감한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전장의 장수는 필요시 군주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병서의 기사는 전장의 상황과 현지 지휘관의 판단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차 간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시라는 2차 간계를 실행했다. 물론 여기까지 계산에 둔 것이다. “마침 그때 가또오가 작은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건너왔는데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우군(愚君)이었던 선조는 대노하여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해임하고 체포 압송토록 왕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임에 전라병사로 전임되어있는 전 경상우수사 원균을 임명했다. 토사구팽, 아니면 전쟁영웅 이순신 장군이 백성들에게 박수 받고 추앙받는 것을 시기하고 또 그 당당한 무장의 위세에 어떤 위기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원균의 음해와 서인들의 탄핵이 선조의 이러한 불편했던 심기에 불을 붙인 것으로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어찌하랴, 하늘은 기어이 조선을 버리는 것인가. 불행 중 다행이도 처형에 직면했던 이순신장군은 우여곡절 끝에 도원수 권율 막하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된다.

한편 각종 음해로 이순신장군을 끌어내리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기고만장하여 전투준비나 왜적 소탕은 외면하고 한산도 통제영에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와 가무 등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여 주변과 휘하장병은 물론 이순신을 따라 한산도에 모여들었던 많은 백성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었다.

그 도가 얼마나 지나쳤는지 보다 못한 도원수 권율장군이 그를 곤양으로 불러 곤장을 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오늘날 합참의장이 해군참모총장(?)에게 곤장을 친 격이니 조소를 금할 길 없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원균은 무리한 출병과 선단의 전열을 무시한 막무가내식 작전을 펴다가 거제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함으로써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 장정들이 그렇게 공들여 건설한 막강한 조선수군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도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지도 않고 허겁지겁 한산도로 돌아와 무기와 군량은 물론 한산도 통제영 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고성 춘원포로 도망쳐 나왔다가 왜군의 매복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것은 바로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將不知兵 以其國與敵)이라고 한 삼략(三略)의 말 그대로 원균은 자신이 비참하게 죽은 것 만 아니라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비극적 위기를 초래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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