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정유 재침을 시도했지만 조선을 강점치 못하게 되자 대명 화평교섭과 함께 순천, 사천, 울산 등 해안지방에 성을 구축하고 또 다른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조명 연합군은 정유년 말 울산성 공략에 실패한 후 무술년에 들어 소위 사로병진(四路竝進)전략을 수립, 실행에 들어간다. 육군은 동, 중, 서로 나누어 각각 울산과 사천, 그리고 순천을 공략하고 수로군은 왜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주로 순천 왜교성을 압박하는 전략인 것이다.

고금도에서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를 편성한 이순신 장군은 사로병진 전략에 따라 공세적인 해상활동을 전개하면서 여수반도를 돌아 광양만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쯤 왜군 진영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무술년 8월 18일 병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조선에 출병한 왜군에게 철수할 것을 유언했던 것이다. 이 지시에 따른 철군 움직임이었다.

왜적들이 7년 동안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강토를 유린할 대로 유린하다가 돌아가고 싶다고 그냥 돌아가게 내 버려둘 충무공이 아니었다.

무술년 9월 15일, 사실상 충무공의 지휘아래 조명 연합 수군은 고금도를 출항 했다. 진린 도독은 비록 두 달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순신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조선 수군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이순신 장군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심지어는 우리 판옥선에 같이 올라타 이순신 장군의 지휘를 받기를 스스로 원했다고 이분의 충무공 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명연합함대는 고흥 땅 나로도와 돌산을 돌아 여수에 잠시 닻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정들었던 좌수영이 왜적의 분탕질로 폐허가 되어있는 모습에 울분을 금치 못했다.

9월 21일 광양만에 진입하여 진린은 묘도의 도독마을 앞에,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역시 묘도의 선장개에 주진을 정하고 곧바로 고니시가 은거중인 예교성 바로 앞 유도로 진군 했다. 유도는 구 광양군 골약면 송도의 옛 이름이다. 유도에서 예교성 까지는 5Km에 불과했다.

예교성은 순천으로 밀려 내려온 고니시가 정유년 9월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3개월 만인 12월에 낙성되었다. 이 짧은 기간에 성을 구축하기 까지는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무자비한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것이다. 예교성은 바다로 돌출 된 산등선에 구축된 것으로 삼면이 바다에 접해있다. 특히 성 바로 아래 바다는 수심이 얕고 간조 때는 개펄이 드러나 선박의 운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더더욱 판옥선 같은 전선이 범접할 수 없는 요새였다. 그리고 순천 쪽에서 육지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에는 방어에 유리하도록 해자(垓字)까지 파 놓았다. 고니시는 이성에 웅거 하면서 무사히 철수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지에서는 명나라의 유정과 우리 도원수 권율의 군대가 압박을 가하고 바다에서는 조명 연합수군이 치받고 있으니 고니시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이날 조명 수군이 바다를 봉쇄하고 있을 때 남해의 왜적이 어선을 가장한 협선을 타고 묘도 쪽에 나타나 우리의 형세를 염탐하려 하는 것을 발견하고 군관 허사인을 보내 추격했다. 놀란 왜적은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자 허사인은 그 배와 각종 물건들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광양만에서 거둔 첫 전과였다.

다음 날인 9월 22일 에는 하루 종일 접전이 벌어졌다. 밀물을 타고 성 바로 아래 까지 접근하여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이때는 조금이라 연합수군의 대형 전선이 성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성위에서 조총을 응사 하면서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23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역시 물길이 얕아 왜성에 가깝게 접근할 수 없어 화포 사용에 제한을 받았고 협공을 펴기로 약속한 육군의 유정 제독이 움직이지 않아 고니시에게 큰 타격은 입힐 수 없었다. 이날 전투에서 왜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우리 쪽에도 일부 부상자가 발생했고 명군은 11명이나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육군과의 협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성 공격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유정 제독은 공성용 사다리를 수리 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기만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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