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 11월 9일, 조명 연합 함대는 고금도를 떠나 다시 광양만으로 출발했다. 육군으로부터 순천의 고니시가 곧 진을 철수하여 달아나려 한다는 통문을 받은 것이다.

11월 11일 다시 묘도에 이르러 진을 쳤다. 다시 수륙협공에 대한 작전 논의가 있었지만 권율 도원수는 “지금도 유 제독은 고니시와 화의를 맺고 이럭저럭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을 보면 왜성에 대한 공격은 처음부터 순조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11월 13일 왜선 10여척이 광양 하포 앞 장도에 나타나 우리 수군의 형세를 정탐하려고 했다. 아마 탈출구를 정찰하려는 기도인 것으로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진 도독과 약속한 다음 수군을 거느리고 왜선을 추격했다. 허겁지겁 왜성 바로 아래 좁은 만으로 도망한 왜선은 하루 종일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적극적으로 왜성을 압박하기 위해 묘도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장도에 진을 쳤다.

그런데 이때부터 고니시는 진 도독과 더러운 거래를 시작했다. 도망갈 길을 열기 위해 진린에게 뇌물 공세를 펴기 시작했던 것이다. 14일부터 16일까지 집중적으로 진 도독에게 뇌물을 바쳤다. 창과 칼, 마필 등 전리품은 물론 술과 돼지머리까지 바치는 것을 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은 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진 도독은 이와 같은 고니시의 뇌물에 눈이 어두워 이순신 장군에게 강화를 허락하라는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장은 강화를 논할 수 없소, 그리고 원수들을 그냥 놓아 보낼 수 없소!(大將不可言和 讎賊不可縱遺)”라고 엄중하게 답하는 이순신 장군 앞에 진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이 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출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고니시는 장군에게도 뇌물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사람을 보내 창과 칼 등을 선물로 바치면서 퇴로를 열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이후 너희 왜적들을 무수히 부수고 잡아 총과 칼을 노획한 것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당장 가져가지 않으면 목을 칠 것이다”라고 호통을 처서 그자들을 돌려보냈다.

고니시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진린 도독은 왜교성을 버려두고 남해로 나가 그곳의 왜적을 토벌 하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이순신 장군에게 통고했다.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명 수군이 맡고 있는 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해협을 열어 고니시의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길을 막고 나섰다.

이순신 장군의 저항에 부딪친 진린 도독은 허리에 차고 있던 긴 칼을 빼어들고 “이 칼은 내가 조선으로 출정할 때 우리 황제께서 친히 내린 칼이요,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소”라고 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위협했다. 이에 장군은 태연하고 엄숙한 어조로“죽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오, 그러나 대장된 자로 결코 적을 놓아줄 수는 없소!”라고 말 하자 진린 도독도 장군의 의연한 태도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고 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진린 도독과 이순신 장군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던 17일, 왜의 중선 한척이 군량을 가뜩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이 발견하고 그 뒤를 추격했다. 왜적이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치므로 왜선과 군량을 노획해 돌아오다가 중로에서 명군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은 장군의 난중일기 11월 17일자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공의 마지막 육필이었음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이 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진린 도독에게 그 전과를 기꺼이 양보했다. 이순신 장군이 능란한 외교로 조명 수군의 협력과 특히 진 도독과의 우호 친분 관계를 잘 유지하여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비록 여러 전투에서 명군에게 전과를 양보하기는 했지만 별도로 부하들의 전공은 빼지 않고 조정에 보고하여 치사를 받게 했던 것이다.

조명 수군의 봉쇄가 빈틈이 없음을 간파한 고니시는 마지막으로 진린에게 남해에 있는 자기들의 진에 사람을 보내 함께 돌아갈 것을 약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청을 넣었다. 진린은 이 간청을 받아들여 연락선 한척이 남해로 건너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급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적의 연락선이 빠져나갔으니 적의 후원군이 온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우리 수군이 그대로 묘도에서 하포에 연하는 선에서 봉쇄선을 치고 있는 것은 복배수적(伏拜受敵)이 되어 어려움을 당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적의 길목을 막아 전투를 결행하는 것이 상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 도독에게 대책을 상의 했다. 자칫 하다가는 명군 자신들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진린은 기꺼이 이순신 장군의 작전계획에 동의하고 나섰다.

정조 때 편찬된 충무공전서의 기사에 의하면, 그날 저녁, 그러니까 작전 개시 하루 전인 11월 18일 저녁 나절에 진린이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왔다. 그 내용인즉“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는데 동방의 대장별이 희미해 가는 것을 보았는데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미칠 것인데 어찌 공은 이것을 모르시오. 그리고 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예방법을 쓰지 아니하시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고였다. 그러나 공의 답서 내용은 대범했다. “나는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가 모두 다 무후만 못하니 비록 무후의 법을 쓴다한들 하늘이 들어줄 리 있으리까”라고 적어 보냈다. 얼마나 대범한 대답인가.

이미 나라와 임금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 이순신 장군에게 방술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오직 자기가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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