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고니시는 봉화를 올려 남해에 있는 적들과 연락을 취했다. 고성, 사천, 남해에 있는 적들이 모두 노량을 통해 광양만에 진입하여 조․명연합수군의 배후를 치면서 고니시를 구출할 계획이었다. 광양만 일대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18일, 조․명연합수군은 어둡기를 기다려 만조가 가까운 10경, 장도 앞바다를 떠나 광양 태인도와 하동 갈사도 앞을 지나 노량으로 직 항진했다.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라서 함대의 항진은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정 쯤 노량으로 향하는 대장선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축원을 올렸다. “이 원수를 갚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만인의 가슴을 찌르는 피맺힌 기도였다.

동짓달의 차가운 달빛은 광양바다 특유의 고요함에 면경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하늘에서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는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 전날 진 도독이 장군에게 편지한 내용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장군만 본 것이 아니라 많은 장병들이 보고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불길한 징조는 여러 기록에 상술되어 있는데 특히 선조가 충무공에게 바친 제문 중에도“큰 공로 세울 적에 장수별이 떨어졌네, 그 충정 생각하매 눈물이 흐르누나”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침착하게 노량의 대도 군도로 접근해 갔다.

무술년 11월 19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날이자 임진․정유 7년 전쟁의 마지막 날이 서서히 밝아가고 있었다. 조․명 연합함대는 좌우로 나누어 진군해 갔다. 이순신 장군은 장병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도록 방어래를 물리고 북도 눕혀놓는 등 철저한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면서 노량의 변월도 앞에 도달했다.

이때 사천에 있던 시마즈루 등이 3백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노량을 거쳐 대도 군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연합 함대는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 들은 우리의 기습에 우왕좌왕하더니 가까스로 전열을 가다듬고 저항했다. 이때, 우리 대장선으로 부터 화공명령이 떨어졌다. 마침 북서풍이 불어 우리 함대가 화공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우리 함대의 화공은 적중하여 많은 왜선이 불탔고 사상자도 많았다.

날이 샐 무렵 적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관음포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관음포의 지형을 광양만에서 바라보면 흡사 물길이 있는 것 같은 착시가 생긴다. 아마도 왜적들이 다급한 나머지 관음포를 자기들이 들어온 노량으로 착각하고 그곳으로 퇴각했던 것으로 군사 전문가 들은 평가하고 있다.

쥐새끼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의 다리를 문다고 했던가. 퇴로가 막힌 왜적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맹렬히 저항 했다. 그러나 전투의 주도권은 조․명 연합군이 쥐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2백여 척의 적선이 깨졌거나 불태워졌고 수많은 왜적의 시체가 바다를 뒤덮었다.

조․명 연합군의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포위망 속에서 허우적대던 적들은 도망갈 길을 찾아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척의 배도 한 놈의 왜적도 살려 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 장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선봉에 서서 도주하는 적을 추격했다. 친히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들기면서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적의 탄환이 이순신 장군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했다. 심장 부근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것이었다. 장군은 급히 명령하여 방패로 앞을 가리게 했다. 자신의 죽음이 적에게는 물론 연합군에 미칠 파장을 염려한 지시였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발설치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고 유언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조 31년, 서기1598년 11월 19일 이른 아침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자자손손 만대에 이르기 까지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광양만의 해룡이 된 것이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달아나는 왜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준 대승이었다. 좌의정 이덕형이 올린 장계 내용을 보면 적선은 3백여 척 중 2백 여척이 패몰되었고 적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격렬한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왜성에 있던 고니시가 지금의 이순신 대교 바로 아래인 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해로를 통해 탈출하고 말았으니 원통하지 않을 수 없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 도독이 대장선으로 다가 오면서 “통제공 어서 나오시오, 우리가 대승을 거두었소”라고 외치면서 이순신 장군을 찾았다.

그때서야 장군을 대신하여 북을 치면서 전투를 독려하던 조카 완이 “숙부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울면서 부음을 전했다. 진린 도독은 배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했고 조․명 연합군에서 나오는 통곡 소리에 바다가 진동했다고 시장(諡狀)은 기록하고 있다.

산도 울고 바다도 울고 조정도 울고 백성도 울었지만 이 기막힌 슬픔을 어이 달랠 수 있겠는가.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 했던가. 아니다, 영웅이 난세를 능히 극복하여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 장렬히 가셨으니 이 얼마나 거룩한 성웅의 생애인가.

백척간두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온 몸으로 구하고 산화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구국 위업은 겨레의 긴긴 역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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