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로부터 정중수 시인과 광양지역 출신인 이균영, 정채봉작가

광양의 현대문학은 광양의 삼학사라 일컬어지던 주동후와 강호무, 김준배의 의기투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동후가 씨앗을 뿌리고 정채봉과 이균영이 꽃을 피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광양서초등학교 동기였던 주동후와 강호무, 김준배는 6학년 시절 문학에 뜻을 두고 3년을 고민한 끝에 광양중학교 3학년 때 마침내 <물망초>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등사판에 룰러를 밀어 만든 인쇄물에 불과했지만 세 소년의 시와 수필, 영시 번역물 등이 담겨 있었다. 후일 주동후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호남문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강호무는 1960년대 한국문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산문시대>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이들 삼학사는 순천고등학교 2학년 시절 김승옥 등과 함께 6인 동인 <구도>를 결성하고 3권의 동인지를 만들어 낼 만큼 문학에 대한 열의가 강했다. 이들 가운데 봉강면 석사리 출신의 김승옥은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을 내놓으며 한국문단을 석권했고, 강호무 역시 문학사에 기억될 만한 시집 <관목>을 내놓았다.

그러나 광양지역 현대문학사에서 단연코 눈길을 끄는 것은 주동후와 정채봉 그리고 이균영의 만남이다. 정채봉이 광양농업고등학교 재학시절, 그리고 이균영이 광양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정채봉은 순천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유년을 광양읍 동외마을에서 보냈고 광양동초등학교, 광양중학교를 거쳐 당시 광양농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964년 광양중학교에 입학한 이균영의 문재를 알아본 정채봉의 소개로 주동후를 만나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 주동후는 이 둘을 위해 광양제일극장 현관에서 이인二人시화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훗날 정채봉은 주동후에 대해 "선배의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그것은 책을 훔쳐내기 위해 것이었다."고 우스개 소리를 할 만큼 문학소년 정채봉과 이균영에 끼친 주동후의 영향은 지대할만 했다. 또한 "이 분은 인자하시다. 안부를 묻다 보면 하루해가 저물게 할 수 있는 다정도 병일 수 있는 분이다"고도 했다. 또한 젊은 이균영은 자신에게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이들을 만나 마음을 털어놓았으며, 이들 선배들은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 아픈 채찍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주동후는 1964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람 부는 날>이, 1966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파도>가 입선하면서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정채봉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이균영은 그보다 4년 뒤인 1977년 같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바람과 도시>가 당선되는 인연을 이어갔다.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인연을 수 십 년간 이어온 이들의 인연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었고, 시린 질책이었으며,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아 한국문단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주동후는 제6회 광주문화상을, 정채봉은 대한민국 문학상과 제33회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아동문학에 가장 큰 금자탑을 쌓아올렸고 이균영은 제8회 이상문학상과 단재상을 수상하면서 뛰어난 문재를 마음껏 발휘했다. 이균영의 문학은 항상 한국문단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평단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들의 몸의 고향, 정신적 고향은 항상 광양이었다. 광양을 사랑했고, 그리워했으며, 광양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 자주 녹여 놓았다. 또한 광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와 여순사건, 한국전쟁, 빨치산 토벌 등 광양의 슬프고 아픈, 시련의 역사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면서 작품 곳곳에 해원하듯 풀어놓곤 했다.

그러나 맏형이었던 주동후는 1996년 가장 어린 후배 이균영을 먼저 잃었고 2001년 간암을 앓던 정채봉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주동후는 2001년 후두암으로 귀천했으나 홀로 남았던 그 생이 어찌 쓸쓸하지 않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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