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는 한산도 해전 패전 후 조선 수군과의 해전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과 바다에서 일전을 벌일 생각을 포기하고 안골포‧부산포‧웅포‧다대포 등의 좁은 포구 안에 군선을 정박 시키고, 포구 뒷산이나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여 해구를 방비하는 전술의 수륙방어 태세로 완전히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명나라를 칠 증원군 10만명을 바다를 통해 평양으로 보낸다는 기본구상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북진해 있던 일본 육군은 보급품 부족으로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또한 한산도 해전은 육전에서 잇단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조정과 조선군에 승리의 용기를 주었으며, 그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 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와카사키는 자신의 영광뿐만 아니라 도요토미의 중국 명나라 침략 야욕도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둘째로 한산도 해전에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풍족한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및 평안도 연안일대를 지켜내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서해로 운영하여 바닷길도 보전할 수 있어,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게 줄 군량이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육지에서도 진안의 웅치(곰티재)에서 김제군수, 정담 등이 분전하였고 이치(배제)에서도 광주목사 권율이 군사 1500여명을 이끌고 동북현감 황진과 함께 용전하여 일본군의 전주진출과 전라도 석권을 막는 효과를 가져 왔으며 육지에서 최초로 거둔 승리로 용인패전의 수치를 씼었다.

이순신 장군도 “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라고 사헌부 지평인 현승에게 편지로 썼듯이 호남은 병참기지로서 또는 군사를 보충하는 역할에서 조선의 울타리 역할을 똑똑히 했던 것이다.

셋째로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 수군이 남 서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의 통로와 보급을 차단함으로써 일본 육군은 더 이상 북진이 어려워져서, 조선 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명나라가 서해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는 가운데 쉽게 원병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2년 12월에 명나라는 송응창 경략과 이여송 도독이 4만 3천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1593년 1월 6일 조선군과 연합으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임진강을 끼고 왜군과 대치하고 강화회담을 열게 되었다.

사실 한산도 해전은 조선으로 서는 국가의 존망이, 일본에게는 전쟁의 승패가, 명나라에는 중국 명나라 영토 내에서의 명‧ 일 전쟁 발발이 걸린 세계사적 대해전이었다.

만일 한산도 해전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남‧ 서해 우회 수륙병진 정책이 성공하고 명나라로 진격하였다면 명‧ 일의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우리는 300여전에 한‧ 일 합방되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져 병참기지로서 갖은 수모와 핍박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에 틀림없다 할 것 이다.

사실 당시 내우외환의 극도로 혼란했던 명나라의 형편으로 보아 일본 대군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 이여서 일본의 대륙지배 가능성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68년 개국된 명은 15세기 초 영락제때 국력이 막강 하였으나, 영락제 사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 하였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북방으로는 몽고족의 침입을 남방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당해서 양방에서 싸워야 했으며, 특히 왜구에 남경이 노략질 당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1572년(선조5년) 만력제가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는데, 초기 10년간은 양명학파의 장거정이 나와 만성적자의 국가재정을 흑자로 만들었으나 이기 죽자 만력제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관료들이 환관들을 이용해 전횡을 일삼았다.

특히 영하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 보바이 반란과 귀주의 토관 양응룡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힘이 들어 국력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1591년에는 여진족인 누르하치에게 밀려 요동을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