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호남지방 사투리로 노인을 가리켜 꼰대라 한다. 이 말은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면서 학생들이 교사를, 자녀가 부모를 그렇게 호칭하기도 한다. 내 나이도 구순이니 이 꼰대 대열에 당당히(?) 끼어든다.   말 ‘꼰대’도 이렇듯이 여러 종류의 사람에게 쓰이듯이 한 마디 말로 뭉뚱그려서 ‘사람’, 또는 ‘인간’ 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수가 몇 십, 또는 몇 만, 몇 억일지라도 그 한 사람 한사람이 결코 다시 판에 판 박힌 듯 하나같지 않다. 개인을 식별하는 데 쓰이는 지문이나 유전자가 각 개인마다 다르듯이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됨됨이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지향하는 인생의 목적도 다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하늘에서 받아 온 사명도 제 각기 다를 것이다(그런 것이 있다는 가정 아래).그래서 난 내 멋대로 사람은 제각기 ‘자기 방정식’을 풀어가면서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인류의 스승들, 붓다나 예수도 각각 자기대로의 삶의 방정식을 풀어보여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사람이 만든 AI(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바득 천재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어 세상에 경종을 울리더니 교육계에도 일대 혁신을 호소하고 있다. 약삭빠른 ICT(정보통신기술)업계가 교육 education과  기술 technology를 합성한 ‘에듀테크(edutech)를 개발하여 어린이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PC등 모바일 기기에 친숙한 ‘모모세대’(more mobile을 줄인 말)에 파고들어가고 있다. 유아교육에 일대 회오리바람이 일 것 같다. 게임을 통한 학습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할 것이다. 강요된 암기위주의 교육방식에 비교육적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좀체로 그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교육계에 일대 경종이자 희망이다. 
이 에듀테크 분야는 그 범위를 넓혀 게임 캐럭터를 통해 영어도 배우고 학생들이 모르는 문제를 대학생들이 동영상으로 해설 강의를 제공하는 과외 앱 ‘케미스터디’라는 것도 나타나 학원을 대신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에듀테크는 컴퓨터로 개인별 맞춤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래 성장 가능성이 더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평가 인력 절감 등으로 교육비용을 크게  절감될 수 있어서 기쁜 소식이다. 교육계에서는 개인 맞춤형 교육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가 알아서 개개인 수준을 판단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필요하다며, 애듀테크는 기술과 지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세분된 평생 교육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진출한 분야는 교육계 뿐 만이 아니다. 이미 금융계에 파고 들어갔으며, 의학계, 일간신문사 등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 신문보도에 의하면 일본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 두 편이 니혼게이자이신문사가 주최하는 공상과학 소설 공모전에서 1심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인간이 줄거리와 인물을 정해 주면 인공지능이 단어조합과 문장을 완성하는 단계이나. 2년 안에 인간의 도움 없이 인공지능이 독자적으로 소설을 쓰게 될 것이 기대된다고 한다. 소설 창작에는 크게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생각해 내야하고 그 스토리에 따라 문장을 완성시켜야 하는데, 지금 단계에서 스토리 구상은 사람의 몫이고 인공지능은 문장을 지어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아직 창작 분야는 인공지능에 빼앗기지 않고 있는 셈인데, 현재 소설 분야 뿐 아니라 음악계에서 작곡에서도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니, 그림을 그리는 분야까지 진출하게 되면 인간과 같은 감정을 나타낼 인공지능의 능력이 선보일 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다.
 
일상생활의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이와 같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본 우리 모두의 일상생활에서도 종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질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21세기 새 시대 새 패러다임의 막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일찍이 ‘자기 방정식’이란 공식을 생각해 인간은 각자가 천부의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니, 제빵기에 찍어낸 붕어빵 인간이 아닌, 얼굴이 다르듯이 그 재능도 다를 것이므로 각기 타고난 재능을 발굴해서 그것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교육계는 물론 산업계에서도 창의적 마인드로 인공지능에 맞서 이길 수 있는 분야를 개발하여 이 시대가 요망하는 창조경제 건설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선두에 서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 정치계가 케케묵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공생공영 사상이 아닌 각자 도생, 사라사욕에 눈먼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꼴이어서 이 사회,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구태의연한 패거리 싸움, 정치는 없고 통치에 매달리는 최고 위정자의 후진성 작태, 국민이 주인임을 망각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의 몰지각성 등이 한심스럽다기보다 가련하다. 
이러다가는 차라리 모든 것을 AI(인공지능)에 일임하고 달나라나 화성나라로 이민 가는 갓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것 역시 AI의 도움 없인 불가능하다? 쿼바디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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