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이르러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국가 전체의 기강이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하면서 국방 강화를 염두에 두지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로 전락한다. 특히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관직의 수를 제한하자 관직을 원하는 양반의 치열한 관직 쟁탈전이 벌어졌다. 
선조 6년인 1575년에는 이조전랑직을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했다. 이조 전랑은 높은 관직이 아니지만, 자신의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할 수 있는 자대법을 적용받았고, 중요한 관직에 인사를 추천하는 통청권을 갖는 직급으로 5품이지만 요직이었다. 때문에 이조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매우 민감한 일이었다.
이조전랑을 놓고 서인인 심의겸과 동인인 김효원이 대립하면서 처음으로 붕당을 형성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 군관 황진 등은 서인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 진언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으리라 진언한다. 단지 백성이 동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다. 
당시 일본의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답서에는 허장성세와 오만불손함이 가득했다. “명나라를 정벌할 테니, 조선이 먼저 항복해 입조하라!”는 식의 협박성 문구도 있었다. 그런데도 선조는 황윤길의 말은 당시 조정의 실세인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배척함으로써 조정에서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조헌이 왜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글을 올리며, 동인을 배척하고 서인인 박순과 정철 등을 옹호하다 유배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붕당은 그 뒤 서인이 노론, 소론, 동인이 북인, 남인 등으로 갈리며 대립하고, 영・정조시대 탕평책을 시행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진 못한다. 조선은 그 후 세도정치로 폐하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당파정치는 오늘날에서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치발전은 요원한 것이 이 같은 붕당정치의 적폐를 답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이 한산도대첩을 거뒀을 무렵, 육지에서는 선비와 무관 출신이 나라의 위급함을 깨닫고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최초의 의병 봉기는 낙동강 언저리에서 일어났다. 정인홍은 성주에, 김면은 거창에, 곽재우는 의령에 거점을 확보하고 주변 고을을 방어했으며, 의병 대장들은 대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조직을 운영하다 보니 부족함이 많았다. 특히 곽재우는 홍의장군으로서 유격전과 지구전을 병행하며 적이 예측하지 못하는 전투를 벌여 군량 수송 등을 크게 방해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해 승병인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회복한 다음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700명이 모두 순절해 ‘칠백의총’을 이뤘는데, 조헌은 이 전투에서 동생과 아들까지 전사한다. 
또한, 경기의 홍계남, 우성전 황해도의 이정암, 함경도의 정문부 등도 용전했고, 승군으로 묘향산의 휴정을 비롯해 유정, 처영 등도 분전했다.
일본과의 휴전 회담을 진행하던 선조 29년인 1596년,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병장이 연루됐다는 모함으로 전라도의 의병장 김덕령과 곽재우도 잡혀 들어간다. 김덕령은 끝내 처형당하고, 곽재우는 풀려난 뒤 전선에서 물러났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아 싸우고는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의병은 지역 지리에 익숙한 점을 살려 적은 병력으로도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고, 이후 의병이 관군에 편입되면서 관군의 전투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선조는 왕권에 위험이 될 만한 무장 세력을 견제했기에, 의병과 관군 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견제와 모함이 뒤따랐다. 선조는 의병을 의롭게만 보지 않았다. 의병의 세력이 커져 백성이 칭송하는 것을 시기하고 두려워했다. 유감스럽게도 선조는 7년 전쟁 후 공신을 두 가지로 분류해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인에 내리는 선무공신의 1등급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올렸고, 2등급에는 김시민, 이억기 등 5명을 올렸다.  
이에 비해 7년 전쟁 때 선조의 피란을 수행한 자로 호성공신 1등급에 이항복, 정곤수를, 2등급에 류성룡, 이원익, 윤두수 등 31명을 올렸으며, 3등급은 무려 55명으로 그중 내시가 24명이나 포함했다. 선무공신은 18명이었고, 호성공신은 총 86명으로서 무려 4배가 넘었다. 그런데도 실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선조는 자신을 따라다닌 자 만을 공신으로 생각한 것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고, 명나라 군대가 참여한 것은 선조 자신이 중국에 호소해 이뤄진 것이므로 강토를 회복한 공이 자신에 있다고 본 듯하다. 
7년 전쟁이 끝난 후 6년 만에 이뤄진 공신 선정에서 의병 출신을 철저히 배제한 것은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나 정묘호란 당시 의병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큰 오점을 남겼다.
7년 전쟁으로 조선의 인구는 크게 줄고 왜군은 철수하면서 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려가 노비로 삼는 등 조선 역사에 가장 큰 비극이었다.
결국, 국방력이 없고 나라의 기강에 서지 않으며 경제력조차 없으면 인접 국가가 가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침략해오는 역사를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현재 남북이 휴전선으로 대치하고, 북한이 핵실험 등으로 호전성을 보이는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주국방을 완비하고 경제력을 튼튼히 하며, 국론 통일을 이룩해 인접 국가가 쉽게 넘볼 수 없는 강한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동지나 적도 없다. 국제관계에서는 항상 자기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역사적인 진리인 듯하다.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일삼아온 정쟁을 풀고 국가 발전과 경제력, 국방 강화에 온 국민이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홍정식 광세사
광양관세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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