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의 매화와 매실을 이야길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광양매실과 광양매화의 오늘을 가능케 한 사람, 바로 청매실농원을 일군 주역이자 우리나라 전통식품명인 1호인 홍쌍리 여사다.
스스로를 ‘아름다운 농사꾼’으로 소개하는 것을 즐기는 홍쌍리 여사는 1943년 정월 초하루,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꽃들과의 대화는 도시 처녀 홍쌍리가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에 시집와
사람이 그리워 시작한 그녀만의
그리움을 해소하는 방식”
이름에 얽힌 사연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그녀의 사주를 받아 본 작명가는 그녀의 부친에게 ‘상의(相義)’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남자 사주를 타고 태어났으니 공부도 많이 시키지 말고, 목소리도 크게 내지 말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출생 신고 과정에서 다시 ‘쌍리(雙理)’로 바뀐다. ‘쌍리’라는 이름은 ‘넓은 세상에서 두 몫의 일을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은 사주를 타고 태어난 홍쌍리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합창단에 뽑혀 활동하곤 했지만, 유난히 고집이 센 아이였다.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시골에 있는 그녀에게는 노래를 해보자는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부친은 “딸을 광대로 만들지 않겠다”며, 그녀의 나이 16살 때 부산에 사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산에서의 생활, 그리고 결혼
홍쌍리는 16살때부터 23살때까지 부산에서 생활한다. 그녀의 숙부는 부산에서 이화상회 건어물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 상회의 점원이자 지배인이었다. 이곳에서 그녀의 별명은 ‘막 퍼주는 가스나’였다고 한다. 어렵게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주문한 것보다 더 많이 주기도 하고, 아이를 업고 군밤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제사를 치른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 포대기에 제수용품을 싸서 찔러넣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숙모의 눈 밖에 나 쫓겨나기도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그녀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훗날 그녀의 시아버지가 된 광양에서 온 김오천씨였다. 김오천은 광양에서 밤을 수집해 홍쌍리가 일하는 가게에 납품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시세로 밤 한가마니면 쌀 2~3가마니에 해당했다고 한다. 김오천은 하동에서 배를 이용해 부산으로 밤을 싣고 와 파는 일을 했다. 1965년, 홍쌍리는 7년여의 부산생활을 접고, 김오천의 며느리가 되어 광양과 인연을 맺는다.
밤나무 대신 매실나무를 심다
도시에서 살던 홍쌍리에게 산간오지 광양 다압의 생활은 매일 매일이 눈물의 세월이었다. 혹독한 시집살이에 일은 넘쳐났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김오천은 선구자적인 면모를 가진 농부였다. 일찍이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과 매실묘목을 들여와 식재한 김오천은 1065년, 농림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밤은 주요 소득작목이었다. 그러나, 홍쌍리는 밤 보다 매실이 좋았다. 고집스런 홍쌍리는 소중한 밤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실 묘목을 심었다. 시아버지의 극심한 반대가 이어졌다. 김오천은 그녀에게 심한 소리는 못하면서도 “무슨 여자가 나무 베는 것을 좋아하냐?”고 질책했다. “꽃이 좋아 매실을 심는다”는 그녀의 말에 시아버지는 “꽃이 밥먹여주냐?”고 나무랐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매실나무 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무를 심는 일은 혼자서 가능해도 밤나무를 베어내는 일은 여자 혼자 할 수 없었다. 시아버지의 눈을 피해 일꾼 둘을 데리고 가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실을 심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
해가 지날수록 밤나무는 줄어들고, 매실나무가 늘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레 꽃동산이 만들어졌다. 봄철 매화가 산을 뒤덮자 이를 보기위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스님과 같은 종교인들도 많이 찾았다. 이렇게 찾아 온 종교인들 가운데 당시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던 법정스님이 계셨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시던 법정스님이 그녀를 만나자고 해도 그녀는 이를 피했다. 3년정도 매화를 보러 찾아 온 스님이 자신을 피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며 “왜 내 말을 안들으려고 하느냐?”고 했다. 스님은 홍쌍리에게 “산 꼭대기까지 매실을 심으라”고 했다. “스님, 그렇게는 못해요. 가파른 산에 매실을 심으면 수확은 어떻게 합니까?”라는 그녀의 말에 법정스님은 “매실은 버려두고 꽃만 보아라. 만인의 정원을 만들어라. 오시는 분마다 마음의 찌꺼기를 다 버려두는 천국을 만들어라”고 답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법정스님은 이후 청매실농원의 모든 것에 대해 세세하게 지침을 주었다고 한다. 누구보다 고집이 센 홍쌍리도 법정스님의 말만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시키는대로 했고, 그 이상으로 해냈다. 현재 청매실농원의 진입로 배치나 건물 위치, 담장의 높이 등도 모두 법정스님이 일러준대로 한 것이다. 공장을 지을 때, 스님은 “이곳은 암놈 학이 둥지를 튼 형세이고, 건너편에 수놈 학이 섬진강에서 먹이를 물어다 암놈 학에게 주는 형세다. 그러므로 앞을 가리는 높은 건물을 지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과의 인연은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37년동안 이어졌으며, 홍쌍리는 법정스님을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추억한다.
꽃과의 대화는 시가 되고…
청매실농원에는 매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을 좋아한 홍쌍리는 이곳에 60여종의 야생화를 식재하고, 이러한 꽃들과 대화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꽃을 의인화해 꽃에게 편지를 쓰는데,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그녀의 꽃에게 주는 편지는 그대로 시가 되었다.
“구절초가 가장 마음을 적셨어. 글을 쓰다보니 그 글이 노래가 되었고 그래서 9곡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게 됐어.” “꽃은 내 딸이고, 매실은 아들이요, 아침이슬은 보석, 흙은 밥이고, 산천초목은 반찬이요, 산에 흐르는 물은 숭늉이라는 생각으로 농사를 시작했지. 그런데, 살대 보니 흙은 내 넓은 가슴이고, 야생화는 내 심장이고, 흐르는 물은 나의 핏줄이었어.” 칠순을 훌쩍 넘긴 홍쌍리에게는 여전히 문학소녀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꽃은 춤추고 / 나는 노래하고 / 새들 피리부는 이 천국에 / 우리 모두 천사로 / 살아왔으면 얼마나 좋겠나 // 매화가 봄 바람에 흩날려 가며 하는 말 / 엄마, 흰머리 하나 더 나지 마라 / 엄마, 주름 하나 더 생기지 마라 /엄마. 아프지 마라 / 내년 봄에 엄마 얼굴 못 알아보면 어쩔끼고 // 이 엄마, 사립문 열어두고 내 딸 기다리마”
“제비꽃이 말했다 / 엄마, 봄비에 세수하고 / 보슬비에 손발 씻고 / 소낙비에 목욕하고 / 어두운 흙이불 헤치고 / 뽀시시 세상 밖에 나와보니 / 엄마, 동무가 많아 참 좋다 / 그쟈?”
꽃들과의 대화는 도시 처녀 홍쌍리가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에 시집와 사람이 그리워 시작한 그녀만의 그리움을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매실, 광양대표 특산품이 되다
누가 뭐래도 매실은 광양의 특산품이다. 매실을 이용한 각종 특산품 개발은 홍쌍리로부터 시작됐다. 매실을 심었던 홍쌍리는 시아버지에게 매실고를 만드는 법과 매실 농축액을 만드는 법을 전수받은데 이어 다양한 매실식품을 개발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개발한 매실식품은 매실장아찌였다. 설탕이 귀한 시절, 소금으로 매실 장아찌를 담으며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홍쌍리는 자신만의 레시피를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1997년 방영된 드라마 ‘허준’은 광양매실을 산업으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드라마를 통해 매실의 효능이 전국적인 관심거리로 등장한데 이어 홍쌍리는 모 방송국의 ‘성공시대’에 출연하면서 광양매실을 마음껏 홍보했다. 이로인해 당시만 해도 ㎏당 500원에 불과하던 매실 가격이 최고 7천원까지 폭등하면서 매실을 광양최고의 효자종목으로 끌어올렸다. 매실의 식재면적이 늘어나면서 매실가격이 하락하고 있지만 매실이 산업으로 정착하는데에는 홍쌍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매실 명인 홍쌍리 여사가 들려주는 매실 농축액 만들기 팁 하나. “매실과 설탕을 1대1로 배합하더라도 젓지 말고 그대로 발효시키세요. 설탕의 30~40%는 가라앉더라도 그대로 젓지 않고 발효시키면 달지도 않고 몸에도 좋아요. 또, 가라앉은 설탕은 재활용하면 되니까요.” / 황망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