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보내어 강화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한산도 및 부산포대첩에서 이순신장군에 참패한 후 수군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서해로의 군량등의 보급지원을 할 수 없고, 겨울추위, 악역의 유행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26년) 5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울산)에서 웅천(창원)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순신은 남해를 전역을 평정하고 수군지휘본부를 1593년 7월 14일에 한산도 옮겼다.
한산도는 남해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곳에 본영을 구축하여야만 왜군이 서쪽해상으로 진출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고 주변에 있는 왜군들을 모두 공격권 안에 두고 언제라도 격멸시킬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93년(선조26년) 8월 30일에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특진하게 되었다.
강화회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인 명나라 황제의 딸을 후비로 맞게 한다는 것, 조선의 전라, 경상, 충청, 경기도의 4도를 일본에 할애하라는 것, 명이 일본의 무역선 왕래를 보장하라는 것과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일본에 보내라는 것 등 일곱 가지의 강화요구조건이 성사되지 않고,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것을 보고 대
 
노하여 무력을 통한 쟁취 방법인 재침을 택하게 되어 제2차 조일전쟁인 정유재란이 서기1597년(선조30년) 1월 14일에 발발하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만 명에 신규 편성군 12만 명을 더해 총 14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이순신은 강화회담기간동안 적의 동태를 감시하며 군비보강과 군사훈련에 몰두하였는데, 대치 상태가 계속되자 이순신과 원균사이에 해묵은 불화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출시키고 나중에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 좌병사로 다시 전출시켰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해서라도 적을 공격해주기를 바랐지만, 이순신은 왜군을 격파하려면 육지에서 육군이 먼저 공격하여 왜군들을 바다로 몰아내고, 이순신의 수군이 퇴로를 차단하여 이들을 기다렸다가 일거에 섬멸하는 수륙병행작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지난 전쟁에서 수군이 참패하여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것을 파악한 일본군은 재침시에 조선수군을 격파해야했고 특히 조선바다의 든든한 파수꾼인 이순신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조선조정과 이순신의 갈등에 대해 알게 된 일본군은 이순신을 제거할 반간계를 쓰게 되는데, 왜장 고니시는 또 다른 왜군 지휘관인 가토와의 불화설을 은근히 흘린 후, 가토가 곧 부산에 상륙을 하니 가토를 이때 해상에서 격퇴하여 체포하라고 고니시의 부하인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정보를 주었다. 김응서의 보고서가 조정에 도착하자 선조는 1597년 1월 2일 이순신에게 가토의 군대가 바다를 건널 때 격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요시라의 정보를 믿을 수 없었고 또한 웅천, 안골포 및 부산포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 수군에 포위될 수도 있고, 거제도, 가덕도, 절영도(영도)등이 일본군에 점령되어있어 함부로 기항할 수 있는 항구도 없으며 부산 앞바다는 물살이 세어서 수많은 왜적선과 대적하는 것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이 조정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재촉하고 권율도원수가 출동명령을 전하려고 1월 14일에 직접 한산도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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