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출동을 거부하고 있는 동안 일본의 가토는 1월12일과 13일에 부산절영도에 상륙하여 서생포(울산)로 가게 되었다. 선조가 내린 명령을 이순신은 이행하지 않자 조정이 들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조정을 기망하여 임금을 무시한 죄, 가토의 상륙을 저지 못한 죄, 부산 방화사건을 허위보고 한 죄와 남의 공(원균)을 가로채고 모함한 죄 등으로 이순신의 검거령이 2월 6일 내려지게 된다.
결국 이순신은 정유년인 1597년(선조30년) 2월 25일 신임통제사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선조는 모진 고문을 가해 이순신을 죽이려했으나 원로대신 정탁이 신구차 통해 이순신을 살려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선조는 일본의 재침략을 앞두고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일단 풀어주고 죄인의 처지로 권율도원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는 전라좌병사였던 원균에게 돌아갔다.
 정유재란은 전쟁목적이 제1차 임진왜란의 신속 정복형으로 조선정복을 통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여 명을 치려는 것에서 도요토미가 명에 요구한 조선4도의 점진형 점령으로 변해있었다. 재침략군은 1번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와키사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 등 역전의 장수에게 수군지휘를 맡겨 해전과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예전처럼 가토군은 서생포에 고니시군은 웅천에 돌아와 주둔했고 수군은 웅천에 주둔했다.
한산도 수군진영에 부임한 원균은 6년 동안 이순신과 동거동락한 휘하 장수들의 암묵적 무시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수군을 부산포로 전진 배치하고 일본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깨닫고, 수군이 홀로 부산포에 출정하는 것을 매우 위험하므로 육군과 동시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순신과 똑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당장 부산으로 가서 일본수군과 싸우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원균은 독촉에 견디지 못하고 1차로 1597년 6월 19일에 100여척이 학익진 함대진열을 갖추고 곧장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일본수군도 배를 타고 나와 응전하였는데, 조선군 우세로 적은 도망가고 말았다. 이때 적선2척을 빼앗었다. 다음은 가덕도싸움이었는데, 이 전투는 적이 배를 버리고 작은 섬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성과가 없었다. 조선수군이 한산도로 귀환하는 도중 안골포의 일본수군이 추격해와 적극적으로 우리 수군배의 꼬리를 애워싸거나 좌우에서 둘러싸고 협격해오는 새로운 전술을 선보였다. 이때 보성군수 안홍국은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안골포의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을 만나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웠으며, 귀환하는 조선함대를 추격까지 하여 적극적 공세 전술로 나와 일본함선 도망, 조선수군 추격이라는 공식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균은 우리 수군의 전술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말았다.
제2차로 원균의 조선함대 140여척이 1597년 7월 6일 쯤 출정하게 되었는데,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나 칠천량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옥포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다대포를 거쳐 부산포로 가게 되었다. 다대포에서 원균은 정박해 있던 적선 8척을 7월 7일 불태웠다.
원균은 다대포해전의 여세를 몰아 부산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했다. 원균의 함대가 부산포에 나타나자 이곳에 있던 일본군은 전투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쓰시마에서 출항한 1천여척의 일본함대가 불쑥 조선수군 앞에 나타났다.
조선과 일본의 제해권을 둔 일촉즉발의 대결이 눈앞에 닥쳤다.
그러나 대해전 양상과는 달리 일본수군은 1천여척이나 되는 대도 1백여척의 조선수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했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풍랑이 심하고 강풍이 불어 조선수군은 함선을 제어할 수 없어 추격하는데 힘만 들었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또한 조선수군 함선7척은 표류되어 가토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서생포까지 밀려가 죽게 되었다. 이때 풍랑으로 20여척의 함선을 잃은 원균은 회군하기위해 간신히 배를 수습하여 가덕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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