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략의 최대 검림돌이었던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전패하자 일본은 전라도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하였다. 전라도 진격의 핵심은 호남제일성인 전주성공격이었다.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 다른 병력은 전주성 이북으로 올라갈 전략이었다. 전주성 공격부대를 좌, 우군으로 나누고 좌군은 5만6천의  병력으로 수군의 도움을 받아 고성과 사천에 상륙한 후 하동과 구례를 거쳐 남원성으로 향하고, 우군은 6만 병력으로 밀양, 합천을 거쳐 진안을 통과하여 전주성으로 진격하기로 하였다.
고니시부대를 포함한 5만 6천여명의 일본좌군이 남원성을 공격할 때인 1597년 8월 13일(선조 30년)에는 남원성에는 명의장군 총병양원이 거느린 3천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지휘하는 1천여명의 조명연합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3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조명연합군이 대패하고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전라병사 이복남 등 조명연합군과 남원백성들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명의 양원장군만이 겨우 살아 도망치고 말았다. 남원성전투에서 순국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무덤인 만인의총이 남원시에 있다.
그러자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2천여명의 조명연합군은 모두 도망치고, 일본의 좌•우군 11만 명은 8월 25일에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1597년 8월 28일(선조30년) 일본의 좌군은 전라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순천으로 남하했고 우군은 서울쪽으로 북상하였다. 도원수 권율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서울에서 수원을 거쳐 계속 남하하던 1597년 4월 13일에 어머님 사망소식의 비보를 받게 되었다.
이순신의 하옥소식에 따라 충격으로 기력이 쇄진한 82세 어머님은 아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배를 타고 여수에서 서둘러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오다 그만 배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어머님빈소에 들른 뒤 도원수 권율이 있는 합천초계에 4월 27일 도착하였다.
권율은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이순신에 예의를 갖추고 배려를 베풀었다. 상중으로 몸이 고단하니 천천히 기력을 회복한 후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이고 이순신이 그의 군관을 거느릴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7월 16일의 칠천량해전의 대패 소식을 접한 권율은 이순신에게 남해연안지방의 조선수군 재건을 위한 현장조사를 의뢰하였다.
이순신은 곤양, 노량진 등을 답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도 면담하였다.
그리고 7월 23일 이순신은 실사 결과보고서를 권율에게 보냈다.
그러던 8월 3일 이순신은 3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하라는 조정의 칙명을 받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3도 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면서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고 나아가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초래하였으니 자신이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라고 반복해서 자책하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신분에서 벗어나 3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것은 이순신의 명예가 회복되고 실질적인 힘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름만 3도 수군통제사지 그 휘하에는 아홉명의 군관과 약간의 군사밖에 없었고 판옥선도 12척 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노량진에 있는 배설에게 함선 12척을 이끌고 전라도 장흥의 군영구미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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