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의 패배로 한산도 전진기지와 여수 좌수영도 적에게 접수 당하였다. 이순신도 10여 명의 참모들과 함께 육로로 구례, 곡성, 옥과, 순천을 거쳐 8월 17일에 장흥의 군영구미에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 이순신은 군사, 군량, 무기를 다수 수습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뒤를 쫓아 일본좌군이 하루이틀차로 시차를 두고 치고 들어오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도착한 장흥군영에 배설과 그의 함선이 보이지 않자 이순신은 18일 다시 길을 떠나 배설의 함선이 있는 회령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3도 수군통제사 취임식에서의 배설의 태도는 영 불손하였다. 이순신은 취임식을 치른 다음 날 회령포에서 12척의 함선과 군사를 이끌고 출항해 완도위에 있는 해남 이진으로 갔다가 다시 8월 24일에는 어란진으로 8월 29일에는 진도의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진도의 서북쪽에 있는 벽파진은 명량의 좁은 해역을 등지고 있었다. 전라도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한산도를 전진기지로 삼았던 이순신이 이번에는 서해를 사수하기 위해 벽파진을 선택했다.
적이 벽파진을 뚫고 명량해협을 통과하면 바로 서해이고, 이는 일본수군이 바로 한강으로 진입하고 서울이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벽파진에서 일본수군과 조선의 운명을 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후에도 수군은 그 규모가 미약하므로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종사하라는 지시를 8월 15일에 내린바 있었다. 이때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여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적들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길뿐 아니라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것 입니다.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않고 살아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장계를 올려 국가수호에 대한 굳은 결의와 용기, 긍정의 힘과 자신감을 보였으며 수군의 작전이야말로 승리의 요체임을 결연하게 주장하였다.
그당시 조선수군은 함선 12척과 정비중이던 함선 1척을 합쳐 단 13척의 함선밖에 없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했었고 이순신자신도 자신의 처지를 처량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수군 2인자이고 경상우수사인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와 같이 또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불리한 전투를 앞둔 9월 2일에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의 카리스마로 근근히 버텨오던 조선수군의 기강은 배설의 탈영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위기였다. 배설은 7년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에 선산에서 권율에게 체포되어 서울에 끌려가 목이 잘렸다. 반면에 일본수군은 남해안 해상권을 완전 장악하여 일본좌군을 지원하였으며,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가서 일본육군에 필요한 군량미와 무기를 지원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전라도 해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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