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원균과 달리 각지에 정찰병을 보내어 일본수군의 동태를 계속 추적하였다. 9월 7일에 일본선 13척이 벽파진과 얼마 떨어지지않은 어란진앞바다(해남)에 도착했다는 정찰병의 급보를 이순신은 받았다.
적선13척이 돌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순신도 바다로 나가 13척으로 맞서니, 일본수군은 배를 돌려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먼 바다까지 추격하다가 돌아왔다. 그 뒤 그날 밤 10시경 일본수군은 포를 쏘며 벽파진으로 야간 기습작전을 도모했지만, 야습에 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함대가 함포로 대항하자 그 막강한 공격앞에 일본수군은 자정에 물러났다.
9월 14일 어란진앞바다에 55척의 일본수군이 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은 이순신은 다음 날 9월 15일에 16일간 머물던 진도의 벽파진에서 바다를 건너 명량의 서쪽에 있는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래면)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진은 넓은 바다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야하지만 전라우수영은 명량해협을 가로막아 그 해협을 통과하려는 적과 전투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지형과 조수를 감안해 내린 판단이었다.
이순신은 대규모로 운집한 적선을 앞두고 좁은 명량해협을 이용해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이는 좁은 통로를 이용해 미약한 전력으로 강한 적을 틀어막을 때의 유효한 전법이었다. 이는 영화 「300」을 보면 스파르타 군사300명이 좁은 협곡에서 수만명의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경우와 같았다. 이순신은 좁고 물살이 센 울돌목에서 조선과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고자 했다.
수많은 적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못하고 몇 척씩만 통과할 수 밖에 없도록하여 일본수군의 최대장점인 많은 함선과 수군을 무용지물로 만들기위해서 였다.
이순신은 9월 15일에 해남의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부하들에게 비장한 각오로 연설을하여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 라고 하며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 너희 장수들은 살려고 생각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고 엄하게 훈시하였다.
이순신은 일대에 있던 피란민 민초들을 안전한 육지로 올려 보내고 어선 백 여척을 모았다. 1597년 9월 16일 밝은 날이 밝자 만조상태인 명량의 좁은 해협을 타고 들어오는 일본수군의 중형선인 세키부네 133척의 대함대가 보였는데, 이는 도도 다카토라, 카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등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13척의 조선수군에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적의 함대는 명량의 폭이 좁아 한꺼번에 달려들 수 없어, 제1선단을 필두로 제2선단, 제3선단의 순서로 차례로 명량해협에 들어왔다.
아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대장선이 선두에 있었고, 그 뒤에 12척의 조선수군 배들이 일자진을 치고 늘어서 있었으며, 그 뒤에 또 위장전술로 요란한 깃발을 꽂은 100여척의 어선들이 모여 있었다.
오전11시쯤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대격전을 명량해협 양쪽육지의 청룡산과 망금산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함선 노군에게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으라고 엄명을 내려, 휘하 함선들보다 앞으로 불쑥 전진하였다. 이순신의 공격지시에 따라 대장선은 일시에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자 바다가 화염에 싸였다. 또한 병사들은 함선위에서 빗발치듯 활을 쏘아댔다. 이들은 이순신을 믿고 수적 열세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의 대장선과 적의 선봉함대는 명량의 바람을 가르며 장대한 화력을 내품었다.
12척의 조선함대는 겁에 질려 눈치만 보며 관망만 한채 뒤에 물러나있고 이순신 대장선만이 솔선수범하며 앞으로 나와 일본함대와 맞서고 있었다. 적함들은 그 한척의 이순신함선에서 비바람같이 품어내는 화살과 함포에 놀라 감히 덤벼들지 못한채 조총을 쏘면서 이순신함선에 포위하려는 기세로 접근과 퇴진을 반복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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