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위상 확보한 광양버꾸농악, 광양에서 외면당하는 것 안타까워
 
  2012년 서커스 반대활동 이후 지역내 활동공간 점차 사라져   
  광양 떠날까 고민하다 팽목항 등 찾아 전국단위 활동 전개
  사라실예술촌 입주, 선납금 문제로 좌절… “할 일은 할 것”
 
 
지난 해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사태와 관련,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한 것 중 하나가 이른 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였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분노한 문화예술인들은 광화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농성을 하면서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했다.
광화문광장의 예술인 텐트를 지킨 광양사람 만고 양향진은 스스로를 ‘굿쟁이’라 칭한다.
광양의 버꾸놀이 농악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앞장 서 온 그와 블랙리스트는 오랜 인연(?)이 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학창시절 ‘탈패’ 활동을 했다고 한다.
전두환 체제하에서 대학가의 탈패 동아리는 대부분 학생운동권과 연계되어 있었고, 풍물이나 탈패공연은 각종 집회나 시위의 필수요소처럼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전국탈패연합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그는 자연스레 운동권의 블랙리스트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고향 광양을 찾아 북채를 잡고 광양의 음악과 풍물을 전수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의 부친인 양일주(82) 옹은 그에게는 스승이었다.
비록 고향인 광양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부친은 전국 풍물굿쟁이들에게는 큰 어른이었고, 큰 스승으로 인정을 받는 이였다. 전국의 풍물패를 사이에서 청년굿쟁이들과 같이 활동하는 진취적인 어른으로 인정받고 있는 부친에게 광양의 풍물을 익힌 그는 이른바 서남해안 일원에서 널리 행해지던 버꾸놀이를 ‘광양버꾸놀이’로 고유명사화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남해안 일원에서 행해지던 북을 중심으로 한 풍물놀이를 일컫는 버꾸놀이는 양향진의 활동으로 민속백과사전에까지 광양버꾸놀이라는 고유명사로 등재되어 있다.
광양정착후 지역문화활동을 하던 양향진은 한때 취업준비를 하기도 했다.
당시, 광양출신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청년들에게 포스코 입사시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말이 있어 고향에 입주한 대기업에 취업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그러나, 그는 입사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가 취업을 준비하던 때는 포스코에 노조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지역문화활동을 하던 양향진은 노조 관계자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고, 노조 출범식에서는 신명나는 풍물놀이 공연을 지원하기도 했다.
입사도 하기 전에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광양버꾸놀이의 원형복원과 전승에 30여년 외길을 걸어왔다. 평생학습시설 등에서 광양의 전통 풍물놀이인 버꾸놀이를 가르치면서 그는 전국 최연소 풍물명인으로 지정되기도 하고, 전통예술분야에서 최초로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한국문예진흥원이 선정하는 신진전통예술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광양시가 시립예술단을 만든다는 것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예술단 창단을 위해 그는 자문역할을 하는 등 적극 협조하면서 시립국악단 결성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힘을 보탰다.
당시 그는 시립국악단의 지휘자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맡고, 광양의 고유음악과 국악을 접목하기 위해서는 광양의 음악을 잘 아는 자신이 총감독을 맡는 투톱 체제가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립국악단 결성이 마무리될 즈음 그는 불의의 사고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고로 예정되어 있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이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길놀이를 해주고 백운산 자락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맬 정도의 부상을 입게 된 것.
심각한 부상으로 몸을 쓸 수 없게 되어 병원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는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시립국악단의 창단에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지휘자 선임 이후 병원에 있는 그에게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2 여수세계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광양시는 엑스포 기간 동안 광양서커스페스티벌을 개최하기로 한다.
그는 광양시가 개최키로 한 이 행사가 “지역통합에도 맞지 않고, 개최 이후에도 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며 친분이 있는 간부 공무원들과 주변 사람들을 설득했다.
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내놓고 반대를 하는 그에게는 다시 미운 털이 박혔다.
양향진은 이 사건 이후 “광양버꾸놀이의 전승을 위해 확보된 예산마저 반납 조치를 당하고, 지역 행사에서도 버꾸놀이가 배척되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서커스 사건 이후 2014년까지 지역에서 그의 활동공간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2014년까지 별다른 일을 못하던 양향진은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가 터지자 자신의 활동무대를 팽목항과 안산, 서울로 옮기게 된다.
어린 넋들을 위로하기 위한 풍물굿판을 조직하고, 2015년에는 전국의 풍물굿쟁이들과 뜻을 모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도보행진을 하기도 했다.
또, 지난 해 사드 배치문제가 이슈로 부상하자 양향진은 10월에 전국의 풍물패들과 성주에서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국정농단으로 인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민심이 폭발하자 11월에는 전국의 굿쟁이들이 광화문에 모이게 된다. 
양향진은 백기완 선생을 찾아가 굿쟁이들의 시국선언문 작성을 요청했고, 백기완 선생은 흔쾌이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굿쟁이들의 시국선언이 나오게 된다.
“최순실 사태 이후 굿이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데, 한국의 굿은 미개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자연에서 주어진 곳을 감사하고, 인간이 신에게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입니다. 또, 공동체나 국가에 부정스런 일이 발생할 때 이를 막기위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고, 풍물은 이러한 제례 속에서 자연스레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전국의 풍물패들과 함께 양향진은 진도에서 전해오는 도깨비굿을 광화문 광장에서 펼쳤다.
“전국의 굿쟁이들과 같이 결합해 매주, 그리고 매일 선봉에 서서 도깨비 굿을 펼친 결과물이 지금까지의 성과라고 봅니다.”
촛불집회가 일상이 되어갈 무렵 광양에서도 23호광장을 중심으로 촛불집회가 열렸다. 양향진은 광양의 굿쟁이들과 이 집회에도 참가하면서 힘을 보탰다.
2016년, 백중날 양향진은 사라실예술촌 인근에 임시로 광양버꾸놀이 전수관으로 활용할 공간을 만들어 개당식을 가졌다.
그와 평소 친분이 있는 보광당한의원의 나상면원장은 그에게 만고(萬鼓)라는 아호를 주었고, 양향진은 광양버꾸놀이 전수관 역할을 할 이 공간을 만고당(萬鼓堂)으로 명명했다.
만고당은 사라실예술촌이 개촌할 경우 입주할 것을 대비해 임시로 마련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사라실예술촌의 운영자가 정해지고 입주공고가 나자 그는 예술촌 한켠에 광양버꾸놀이 교육장을 마련하자는 생각으로 입주신청을 했다.
사곡초등학교가 폐교된 이후 그는 오랫동안 이곳에 버꾸농악전수관을 확보하려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예술촌이 본격 운영을 앞두고 입주작가를 모집하자 이에 응모한 것.
그렇게 입주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까지 보았다.
설 연휴 직전, 입주를 하려면 200만원을 선납금으로 내야 한다는 통보가 왔다.
당시 별다른 수입이 없었던 그는 문의 결과 설 연휴 이후에 선납금을 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연휴가 끝나는 시점에 200만원의 선납금을 확보했다.
그런데, 연휴가 끝난 후 그는 카카오톡 문자메세지를 통해 입주계약 해지를 통보받게 된다. 
입주자 모집 당시 선납금 200만원을 내야 한다는 조항도 없었지만, 그는 “아,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입주를 포기했다.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왜 인간적인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집안을 제대로 못챙긴 것, 광양버꾸농악이 광양사람들의 관심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는 것이 나의 소홀함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 일이 정확하다 보니 할 일에만 매진하기로 마음을 다잡았지요.”
지역에서 활동공간을 찾지 못하던 2014년 무렵, 그는 광양을 떠날까 고민했다고 한다.
“지역 내에서의 활동이 차단됐습니다. 그러다보니 활동가로서의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3년부터 현장활동을 했는데, 당시 생각해 보니 30년정도 광양의 이름을 걸고 버꾸농악을 가르친 사람이 7만명이 넘었더군요. 광양버꾸놀이를 배운 사람은 광양사람도 있지만, 외지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외국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버꾸놀이를 배운 사람들이 자기나라에 돌아가서 광양버꾸놀이 공연을 펼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버꾸놀이의 세계화에도 기여했다고 봐야죠. 광양이라는 지역의 끈, 광양사람으로만 산다기보다  양향진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광양에서 자신의 활동무대가 사라진 것은 서커스 반대운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지역 문화계의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겠지만 양향진은 “지역의 블랙리스트가 결국 국가적 위기상황에서의 블랙리스트”라고 규정한다.
“지역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늘 현실에 참여하고 행동했습니다, 초라한 공간이지만, 만고당은 전국의 굿쟁이들이 찾아옵니다. 품앗이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굿인데, 전국에서 품앗이를 하려 오는 사람들이 먹고 잘 공간이 없습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품앗이 하러 오는 굿쟁이들에게 다소 허름하게, 불편하더라도 쉬지않고 할 바는 다 하고자 합니다.”
양향진은 말한다.
“철저하게 고립을 시켰습니다. 문하생들마저도 등을 돌리게 됐고, 문화원, 예총, 시까지 광양버꾸놀이를 따돌리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읍면동 단위로 풍물패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광양이 유일합니다. 그런 것들에서 위안을 삼아야지요.”
광양의 굿쟁이 만고 양향진. 그는 여전히 사글세 100만원짜리 초라한 전수관 만고당에서 광양풍물의 보급과 전승을 위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황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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