隔江望幸州(격강망행주)[1]
/ 매천 황현

걷기엔 마치 좋네 험하지 않는 산성
역사적 자취 남아 예까지 찾았으니
여태껏 슬피 울었네, 야트막한 자리엔.
地下徒爲險    我來看幸州
지하도위험    아래간행주
山城如此淺    蠻鬼至今愁
산성여차천    만귀지금수
 
험하지도 않는 땅에 행주 땅을 찾아왔네, 
높지 않고 야트막해 왜놈 귀신 슬피 울고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 정상에 축조된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으로 진영을 꾸렸던 곳이다. 시인은 땅이 걷기에는 아직은 험하지는 않아서, 나도 역사적인 행주를 찾아와 보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행주산성 저토록 높지 않고 야트막하건만(隔江望幸州1)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율시 전구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땅이 걷기에는 아직은 험하지는 않아서 / 나도 역사적인 행주를 찾아와 보았다네 // 행주산성 저토록 높지 않고 야트막하건만 / 왜놈 귀신들은 여태껏 슬피 울었구나]라고 번역된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험하지도 않는 땅에 행주 땅을 찾아왔네, 높지 않고 야트막해 왜놈 귀신 슬피 울고’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강 건너 행주산성을 바라보며1]로 번역된다. 선조 26년(1593) 2월 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장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드디어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고 한다. 곧 아낙네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이런 연유로 인해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행주치마는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이지만 ‘행주’를 ‘幸州’로 조어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시인은 이런 영사적인 배경을 생각하면서 그 권율 장군의 얼이 스며있는 멀리 강 건너에서 행주산성을 조망하고 싶었음을 알게 한다. 땅이 말라 걷기에는 아직은 험하지는 않아 행주선성에서 시인 또한 역사적인 행주를 찾아와 보았다는 선경의 시상의 역사의 흔적을 잘 알게 한다. 역사의 자취를 찾거나 멀리서 조망하고자 하는 시인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화자는 행주산성이 높이가 야트막하다는 정도를 상상하면서 저 성을 넘지 못해 왜놈 귀신들이 한탄하고 있다는 시상을 일구어냈다. 저 쪽에 보이는 행주산성이 저토록 높지 않고 야트막하건만, 몰살당했던 왜놈 귀신들은 여태껏 슬피 울고 있을 것이라는 후정의 시적 지향을 한껏 담아내고 있다.
 
【한자와 어구】
地下: 땅. 혹은 땅 속. 徒爲險: 한갓 험하지도 않다. 我來: 내가 왔다. 看幸州: 행주산성을 보기 위해  // 山城: 산성. 如此淺: 이와 같이 야트막하다. 蠻鬼: 왜놈들. 至今愁: 지금까지 근심하다. (행주대첩을) 두려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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