村居暮春(촌거모춘)[4]
/ 매천 황현

발걸음 가벼웁게 흥 겨워 찾아가니
문 앞엔 한참동안 글 읽는 소리 들려
십년간 꽃구경하니 설경 함께 늙어가네.
隨意相尋野屧輕    門前厭聽讀書聲
수의상심야섭경    문전염청독서성
十年湖海看花伴    强半人間老舌耕
십년호해간화반    강반인간노설경
 
 
발걸음도 흥에 겨워 글을 읽는 소리 듣고, 
강호에서 꽃구경을 속세 설경 늙어가네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소강절(邵康節)로 알려진 강절(康節) 소옹(邵嗈: 1011~1077) 시인의 작품 [모춘(暮春)]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숲 아래 살면서 늦잠만 자는데(林下居常睡起遲) / 오가는 사람 발길 끊어져 견딜 수 없네(那堪車馬近來稀) // 늦은 봄 한나절 발은 땅에 드리워졌고(春深晝永簾垂地) / 바람도 없는 정원에 꽃잎 날리네(庭院無風花自飛)]라고 했다. 이 작품 또한 읽고 있으면 매천 시인의 작품과 비교된다. 시인은 발걸음 가볍게 흥에 겨워 찾아갔다가, 문 앞에서 한참동안 글 읽는 소리 듣는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십 년 동안 강호에서 꽃구경 함께하더니(村居暮春4)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배율이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발걸음도 가볍게 흥에 겨워 서 찾아갔다가 / 문 앞에서 한참동안 글 읽는 소리 들었네 // 십 년 동안 강호에서 꽃구경을 함께했더니 / 쉰 살 먹어 속세에 설경하며 늙어 가네]라고 번역된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발걸음도 흥에 겨워 글을 읽는 소리 듣고, 강호에서 꽃구경을 속세 설경 늙어가네’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늦은 봄을 시골에서 보내면서4]로 번역된다.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暮春(모춘=유선사) 작품도 또한 시적 대비성에 의한 늦봄을 시샘하는 듯 모춘(暮春)을 시제로 한 작품이다. 시적 대비의 자리에 놓았던 소강절의 작품에서는 [늦봄이 되면 숲 아래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늦잠만 자곤 했는데 오가는 사람 발길마저 끊어져서 더욱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는 선경의 시상이다. 늦은 봄 한나절 긴 발은 땅에 드리워졌는데 바람도 없는 정원에는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는 후정을 소복하게 담아두었다.
늦잠 자고 발을 드리운다는 소강절의 시상과 달리 시인은 글을 읽는 소리에 흥이 겹다는 덧신을 잘 신겨보는 느낌을 받는다. 발걸음도 가볍게 마냥 흥에 겨워 찾아갔더니만 문 앞에서 한참동안 쩌렁쩌렁 글 읽는 소리를 들었다는 선경의 시낭(詩囊)이 넉넉해 보인다. 강호에 늙어가는 자기를 한탄한다는 시적인 멋을 만난다.
화자는 누가 뭐라고 한다 해도 강호와 벗을 삼고 설경하면서 늙는다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십 년 동안 강호에서 꽃구경을 함께 했었는데, 쉰 살 먹어 속세에 설경(舌耕)하며 늙어 간다는 후정을 다소곳이 놓고 있다. 설경은 강연이나 연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모춘을 보내는 시인 매천의 뜻을 알겠다.
 
【한자와 어구】
隨意: 뜻을 따라서. 相尋: 서로 찾다. 野屧輕: 나막신을 가볍게 신다. 門前: 문앞. 厭聽: 한참을 듣다. 讀書聲: 글 읽는 소리. // 十年: 십년. 湖海: 강호에서. 看花伴: 꽃구경을 하다. 强半: 쉰 살 먹다. 人間: 인간 속세. 老舌耕: 설경(강연, 연설 등)하며 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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