血竹(혈죽)[1] 
/ 매천 황현

푸른 대 공중에서 뿌리를 내렸으니
그 충의 하늘 근본 다 했기 때문이네
성인이 들으시옵고 비 오듯 한 눈물이.
竹根於空不根土    認是忠義根天故
죽근어공불근토    인시충의근천고
山河改色夷虜瞠    聖人聞之淚如雨
산하개색이로당    성인문지루여우
 
대가 공중 뿌리 내려 하늘 근본 충의 때문, 
오랑캐들 눈이 휘둥 성인 눈물 비 오듯이
 
1905년 11월 17일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넘어간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음이 알려지고, 11월 20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되면서 전국의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시인은 대가 흙이 아닌 공중에서 뿌리를 내렸으니, 그 충의 하늘에 근본했기 때문임을 알겠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산하가 빛나고 오랑캐 눈이 휘둥그레지니(血竹1)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배율이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대가 흙이 아닌 공중에서 뿌리를 내렸으니 / 그 충의 하늘에 근거하였음을 알겠네 // 산하가 빛나고 오랑캐들 눈이 휘둥그레지니 / 성인께서 들으시고 눈물이 비 오듯 하네]라고 번역된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대가 공중 뿌리 내려 하늘 근본 충의 때문, 오랑캐들 눈이 휘둥 성인 눈물 비 오듯이’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피로 얼룩진 대나무를 보고1]로 번역된다. 고위직에 있었던 그였지만 정면 돌파는 허사였다. 그는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표하고자 자결했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비탄의 통곡 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조병세(趙秉世), 송병선(宋秉璿) 등 수많은 우국지사뿐만 아니라 인력거꾼 같은 일반 백성들도 연쇄 자결함으로써 국권 회복과 항일 의지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충정공은 자결의 뒤를 이어 공중에서 돋아난 붉은 피를 묻히는 것처럼 붉은 대가 솟아 오른 것이다. 시인은 이런 점을 착안하면서 시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대가 흙이 아닌 공중에서 뿌리를 내렸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로구나 하는 마음을 담아 그 충의 하늘에 내린 까닭을 알겠다고 했다. 분명히 자결의 피가 엉기는 모양으로 온 나라의 화제가 되었던 대사건이기도 했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우리의 산하에 그 빛을 발했다고 했다. 온 나라 산하가 빛을 발했고 오랑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서로가 놀라는 기색을 시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성인께서 이를 겸허하게 들으시고 눈물이 비 오듯이 했었다는 시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자와 어구】
竹根: 대 뿌리. 於空: 공중에, 不根土: 흙이 없이 뿌리내리다. 認是忠義: 이 충의를 알겠네. 根天故: 하늘에 뿌리내린 연고네. // 山河改色: 산하가 빛나다. 夷虜瞠: 오랑캐의 눈이 휘둥그레지다. 聖人聞之: 성인 그것을 듣다. 淚如雨: 눈물이 비 오듯 하다.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