血竹(혈죽)[4] 
/ 매천 황현

신령이 환생하여 다시 금 오신 듯이
곡소리 그치면서 흰 병풍을 걷어보니
거미줄 눕게 되어서 영원히 잠자리라.
精靈所化現再來    驚天動地何奇哉
정령소화현재래    경천동지하기재
晝哭聲斷素屛捲    蛛絲旖旎塵爲苔
주곡성단소병권    주사의니진위태
 
령이 환생 다시 오니 경천동지 기이하고, 
흰 병풍을 걷어보니 얽힌 먼지 이끼 되고
 
나라가 어수선한 시국에 선생의 부인 박수영씨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겨 무료한 세월을 보냈단다. 이듬해 7월 어느 날, 부인은 선생의 유품을 보관해 두었던 방에 환기라도 시킬까 하고 문을 여는데,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다. 남편이 죽을 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모셔둔 마루방의 틈새에서 난데없이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는 게 아닌가! 이 청죽으로 인해서 조선 사회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었다. 시인은 신령스런 령이 환생하여 지금 다시 오시니, 경천동지할 이 일이 어찌 그리 기이하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거미줄 얽혀 있고 먼지는 이끼가 되었네(血竹4)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배율이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신령스런 령이 환생하여 지금 다시 오시니 / 경천동지할 이 일이 어찌 그리 기이하뇨 // 낮에 곡소리가 그치고 흰 병풍을 걷어 보니 / 거미줄이 얽혀 있고 먼지는 이끼가 되었네]라고 번역된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령이 환생 다시 오니 경천동지 기이하고, 흰 병풍을 걷어보니 얽힌 먼지 이끼 되고’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피로 얼룩진 대나무를 보고4]로 번역된다. 위와 같은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민충정공의 집으로 몰려왔다. 사람들은 "대나무가 선생이 순절할 때 흘린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 하여 '혈죽'이라 부르며 용기를 갖기 시작한다. 4줄기 9가지에서 45장의 잎이 피어난 대나무는 선생이 순국할 당시 나이와 같아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이 일은 '민영환의 혈죽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매일신보’ 등에 대서특필로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시인은 보국을 위한 진정성이 그러했다면 죽어도 죽지 않고 온 국민의 큰 교과서와 같은 서기는 아닐까. 신령스러운 그 령(靈)이 다시 환생하여 지금 다시 오시니, 참으로 경천동지할 이 일이 어찌 그리 기이하겠는가를 묻는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오천년 역사를 두고 또 이러한 일이 있었던가를 물어 볼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화자는 시인의 신묘한 생각에 빠지면 낮에 곡소리가 그치고 흰 병풍을 걷어 보았더니 거미줄이 얽혀 있고 먼지는 이끼가 되었다고 했다. 충정공의 부인 박씨는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하여 자줏빛 보자기로 싸고 폭 8cm, 길이 50cm 정도의 나무상자 속에 넣어 잘 보관해오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곱게 전하고 있다고 한다. 신묘한 일이다.
 
【한자와 어구】
精靈所化: 신령스런 영이 화하다. 現再來: 현재에 오다. 환생하다. 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다. 何奇哉: 어찌 그리 기이한가. // 晝哭聲斷: 낮에는 곡소리 그치게 하다. 素屛捲: 병풍을 걷어 보다.  蛛絲旖旎: 거미줄이 얽히다. 塵爲苔: 먼지가 이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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