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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해전의 역사적 조명(4)조명 연합군, 절이도에 매복했다 왜적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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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20  0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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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정식 광양관세사무소 관세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 제14회 행정고시 합격 관세사시험 출제위원 / 관세직 5급 승진 시험위원 한국관세학회 부회장
이순신은 조선수군 재건과 백성들의 생활안정, 명나라 수군을 맞기 위한 병영건설, 무기제조, 군량미 비축, 염전사업 착수 등 군경영 전반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고금도에 진을 친후 5개월 후 수군재건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함대는 85척으로 늘어났고, 군사의 수도 1만 여명으로 늘어나 당당한 군세를 이루었다. 명나라는 1598년 2월 1일에 진린도독을 시켜 전선 500여척과 절강성 수군 1만 5천명을 이끌고 충남 당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진린은 7월 16일 이순신의 고금도 진지 서쪽 옆 200m근처의 묘당도에 진을 쳤다.
 
이순신은 포악하다고 소문난 진린이 고금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군을 시켜 해산물, 사슴, 돼지를 충분히 잡아오도록 하여 술과 안주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으며, 진린의 배가 보이자 멀리까지 영접하고 대의를 갖추어 엄숙하고 성대한 군대의식을 베풀어 크게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 진린 이하 군사들도 “과연 소문대로 훌륭한 장수다” 하며 이순신을 크게 칭송하였다. 
 
그러나 진린 도독의 명나라 군사들이 처음오던 때부터 자못 약탈을 일삼아 우리군사와 백성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가옥들을 한꺼번에 헐게 하고, 이순신의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옮기게 하였다. 이에 진린 도독은 이상히 여기고 하인을 이순신에게 보내 물어오자, 이순신은 “귀국 군사들이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군사들과 백성들과 함께 나도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진린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순신을  적극 만류하자, 이순신은 귀국 군사들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내게 달라 요구하자 진린도 할 수 없이 이순신에게 명의 군사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었고, 이후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는 잦아들었다. 
 
진린함대가 고금도에 도착한지 이틀 후인 1597년 7월 18일 일본수군의 배 100여척이 고흥군 녹동을 침공한다는 보고였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도독과 같이 전선을 타고 완도군 금당도에서 밤을 새며 탐망해 보았으나 적선 두어 척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적이 크지 않아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고금도로 돌아왔다. 대신 조선수군은 녹도만호 송여종이 8척의 판옥선을, 명의 수군은 30척의 전선을 이끌고 고흥군 절이도(거금도)로 나아가 거기서 함께 복병하고 있다가 7월 24일 새벽에 드디어 상호간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조선수군이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며 화포와 돌과 활을 마구 쏘았다. 송여종의 대활약으로 적선 50여척을 불태우고, 왜적 100여명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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