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계기로 정치 입문… 보건대 살리기 주력

법은 우리의 생활수준을 높여주고 우리가 보다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없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사회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아울러, 법에 대한 법률 지식이 없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만큼 불리해지고 억울함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변호사라고 부른다. 
법을 수호하기 위한 변호사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광양에서 변호사라는 정의 앞에 바른 일을 실천하는 서동용 변호사를 만나본다.
 
■서 변호사의 법률 철학
서 변호사는 2015년 중마시장 건너편에 법률사무실을 개소하고 광양지역의 법률 분쟁을 담당해 오고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광양의 변호사는 서 변호사가 유일했다.
서동용 법률사무소를 찾는 의뢰인들은 하루에도 수 십 명. 이들은 지역의 부동산 법률분쟁, 공사업체 대금 문제, 유치권 관련 소송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 변호사를 찾아 법률자문을 구한다.
이에 서 변호사는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를 정도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절실함이 담겨져 있기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법률적 도움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은 외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닌 광양에서도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이 서 변호사의 전언이다.
 
■실패가 인생을 바꾸다
서 변호사는 사실 처음에는 변호사에 마음이 없었다. 광양에서 성장해 연세대 행정학과에 입학하기 까지 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두 차례 감옥에 가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이로 인해 취직은 어렵게 되어 1989년 광양으로 다시 내려오게 됐다는 것. 
친구의 소개로 동서식품 대리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컴퓨터대리점,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체 등 많은 일에 손을 됐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서 변호사는 이렇게 해서는 내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늦은 36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때 아내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는 거죠.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 변호사는 사법시험을 39살에 합격하고 서울에서 10년간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다가 2015년 다시 광양으로 내려오게 된다.
 
■정치에 뜻을 두는 이유
광양에 다시 내려온 서 변호사는 존폐기로에 선 광양보건대 정상화에 앞장서 노력했다. 어떠한 방법이든 광양보건대를 위한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 하에 관련 법 및 정관을 수십 번도 더 읽었다. 비록 아직 해결이 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는 마음이 아직도 급하다.
“이러한 일들은 어느 한쪽만 움직여서 해결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시와 교육청, 그리고 시민 모두가 한마음이 돼 보건대를 살릴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줘야 합니다.”
서 변호사는 지난 20대 총선 당시 정치에 뜻을 두고 총선출마를 표명한 바 있다. 
세월호 사건이 그를 정치에 입문 시키게 했다고 한다.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르게 서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법적 분쟁해결이나 정치의 분쟁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분쟁해결에 있어 주도적인 역량을 펼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서 변호사는 오늘도 절박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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