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망기 발행인
엄혹한 시절이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든 시절에 이념은 모든 것을 적과 우리로 나누었다.
광양출신 사진작가 이경모 선생이 생생하게 기록한 해방공간의 광양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업고 시체더미 속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는 아낙의 처연한 눈동자, 죽창을 손에 쥔 앳된 여학생들의 모습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살육이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동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소속 병사들이 제주 4.3항쟁 토벌 명령을 받고 동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일으킨 봉기를 군사정권과 독재정권은 ‘여순반란산건’이라고 규정지었다.
봉기를 일으킨 군인들은 순천을 거쳐 광양의 백운산을 넘어 지리산으로 건너갔고, 이들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인민군 패잔병들과 함께 빨치산이 되었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남긴 상처는 컸다.
도처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극한의 잔인함이 넘쳐났다.
산에 사는 밤 손님들은 끼니를 때우기 힘든 농촌마을의 식량을 털어갔고, 낮에 찾아 온 군인과 경찰들은 식량을 뺏긴 사람을 빨치산부역자라며 닥달했다.
부역자에게는 재판도 없는 살육이 진행됐다.
그리고,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순반란사건’은 ‘여수14연대반란사건’으로, 다시 ‘10.19사건’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이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어도 피해자 유족들은 ‘빨갱이’로 규정되는 것이 무서워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제주4.3폭동’은 ‘4.3사건’을 거쳐 ‘4.3항쟁’으로 위상을 찾아갔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사업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수와 순천, 광양을 비롯한 백운산과 지리산 자락에 묻힌 숱한 희생자들의 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거창 신원리 양민학살사건과 지리산 자락 산청과 함양 경계지역에서 일어난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은 이미 국가차원에서 추모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그렇지만 수많은 신원리 사건과 산청함양사건은 여전히 실체조차 규명되지 못한채 묻혀있다.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다.
이데올로기가 뭔지, 좌익이 뭐고, 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순사건 특별법은 제정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의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광양시의회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하고, ‘광양시 여순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의결했다.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지역 차원에서도 이제라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준비들을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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