哭勉菴先生(곡면암선생)[3]

                                      매천 황현
의병의 북소리에 피비가 영롱하고
외로운 신하 담소 운명을 결정지어
부심한 만리 밖 남관 손꼽아 기다리며.
義皷聲摧血雨斑   孤臣判命笑談間
의고성최혈우반   고신판명소담간
腐心萬里南冠縶   屈指三霜赤舃還
부심만리남관집   굴지삼상적석환
 
의병 그쳐 피비 영롱 외론 신하 운명 결정, 
부심 만리 남관 매니 삼년 굴지 기다렸네
 
면암은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민비학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다른 상소들이 잇따랐다. 시인은 의병의 북소리 그치자 피비가 영롱한데, 외로운 신하는 담소하며 운명을 결정지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삼 년을 손꼽아 적석 돌아오기 기다렸네(哭勉菴先生3)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 세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의병의 북소리 그치자 피비가 영롱한데 / 외로운 신하는 담소하며 운명을 결정지었네 // 부심하며 만리 밖에서 남관을 매니 / 삼 년을 손꼽아 적석 돌아오기 기다렸네]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의병 그쳐 피비 영롱 외론 신하 운명 결정, 부심 만리 남관 매니 삼년 굴지 기다렸네’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죽음을 통곡하며3]로 번역된다. 시어로 쓰인 ‘남관(南冠)’은 초나라의 관으로, 포로가 되어 남의 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면암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의 고령으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여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된 일을 말한다. ‘적석(赤舃)’은 원래는 임금이나 제후가 정복을 입을 때 신는 신이지만, 후대에는 두루 고관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선 최익현이 1902년에 정2품인 정헌대부가 되어 이렇게 표현했다.
시인의 시상은 언어의 마술사나 되는 것처럼 비유법의 달인을 자처하는 모양을 갖춘다. 면암이 의병의 북소리 그치자 피비가 영롱하기만 한데, 외로운 신하는 담소하며 운명을 자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의병을 모아 분연히 싸우면서 자기 의지를 폈던 그 일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시적대상자인 면암이 남관이 되어 영어의 신세가 되었던 관계로 적석 되었음을 피력했으니 선견의 소망으로 기다렸다는 의미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부심하며 만리 밖에서 남관인 남의 나라 감옥에 있었으니 삼 년을 손꼽아 적석 돌아오기 기다렸다고 했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인 양 고사의 인용하는 달인을 자초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한자와 어구】
義皷聲摧: 의병의 북소리 그치다(‘皷’는 ‘敲’와 같음). 血雨斑: 핏빛이 영롱하다. 孤臣: 외로운 신하. 判命: 운명을 결정짓다. 笑談間: 담소하는 사이. // 腐心: 부심하다. 萬里: 만리 밖. 南冠縶: 남관을 매다. 屈指三霜: 삼년을 손꼽아. 赤舃還: 적석 돌아오다. 최익현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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