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왜교성은 순천에서 여수쪽 남쪽으로 약 12Km떨어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은 성이다.
1597년(정유년) 9월 7일에 왜군은 경기도 직산 전투에서 명의 육군에 패한 후 울산, 사천, 순천에 새로운 왜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순천 왜교성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겸 최후방어 기지로 삼기위한 것이였고 일본군이 호남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요새였다.
순천 왜교성은 외성길이 2.5Km, 내성길이 1.34Km이며 외성은 1겹의 토성이고 성앞에는 목책을 이중, 삼중으로 박아 외부에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내성은 석성으로 다섯겹으로 쌓았으며 제일 높은 곳에는 3층 높이의 천수각이 있었는데, 외성 평균높이는 5m, 내성 평균높이는 4m이다.
내‧외성사이에 깊은 해자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들였는데, 그 위에 두 개의 문지를 세우고 통로를 만들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면 다리처럼 보여서 왜교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왜교성 해자를 북쪽 육지 쪽으로 깊숙이 파고 신성포해상을 나무 말뚝으로 빽빽하게 박아 목책을 만들고 왜선 약 500여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해안가와 성밑에는 진지를 구축하고 화포를 배치하여 상륙하지 못하도록 방어진을 구축했다.
왜교성은 3면이 해상이고 1면만이 육지였지만 육지에 접한 땅은 질퍽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다.
이 왜교성에는 1597년 9월부터 고니시 유키나가가  휘하 1만 4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인 포로도 1만여명이 있었으며, 남해도 왜성에는 소 요시토시의 병력 1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서로군인 조명연합육군은 순천과 왜교성 중간사이에 있는 옛백제 산성인 검단산성에 명나라 제독 유정의 2만 1천 900명과 조선관군 5,928명이 권율 도원수와 전라 병마사 이광악 지휘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해상 서로군 으로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약 7천7백명, 이순신의 조선수군 7,328명이 있었으며, 또한 우의정 이덕형, 호조판서 김수등이 사후사, 접반사 자격으로 전투를 참관하고 있었다.
1598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벌어진 싸움이 왜교성 전투이었으며, 조명연합군과 왜의 명운이 달린 최후의 국제 전이였다.
조명연합군은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해가는 수륙협공합동공격이 목표였다.
이때 순천왜교성 광양만 앞바다는 온갖 분탕질을 치고 조선인 3백만 명(전사, 아사, 병사)을 참살하고 그냥 내빼려는 왜군과 조선인들을 도륙하고 조선 강토를 유린한 왜적들을 한 놈도 그대로 돌려 보낼 수 없다는 이순신의 대립으로 팽팽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정유재란의 전황은 1598년 8월 18일에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가 후시미성에서 63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으면서 조선에 파병된 왜군을 철수시키라는 유언이 있었기에 일본내 정무담당 대로들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11월 15일 까지는 부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모두들 귀국준비에 정신이 없는 상태이었다.
9월 18일에 유정이 전주를 거쳐 남원에 도착하자 고니시는 유정에 사신을 보내 순천의 해룡창에서 만나 강화협정을 맺자고 서신을 보냈다.
유정은 고니시가 강화협상하려는 의도를 알고 전투보다는 고니시를 속여서 사로잡을 궁리를 하였다. 9월 19일에 검단산성에 주둔한 유정은 고니시에 9월 20일에 서로의 중간지점인 해룡창에서 만나 강화협상을 하고, 서로 화해하자고 합의 하였다.
유정은 이를 계기로 고니시를 사로잡을 욕심으로 기패관 왕문헌을 유정 제독이라 속이고, 우후 백한남을 권율 도원수다 속여서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명나라 군사가 지레 대포를 미리 쏘는 바람에 오는 도중 크게 놀란 고니시는 왜교성으로 급히 달아나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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