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에 진린은 “순천왜교성은 3면이 바다이므로 우리 수군이 먼저 대포를 쏘아 성을 무너뜨리겠소”하며 왜성에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진린의 의도와는 달리 조명연합수군은 아침에 진군하여 활을 쏘기도 하고 화포를 쏘기도 하며 왜교성으로 접근했다가 마침 바닷물이 급히 빠지는 바람에 수심이 얕아져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때 고니시 왜군도 성에서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조선수군은 왜교성 전투를 정탐하려고 남해 왜성에서 온 왜군 정탐선을 추격한 끝에 배를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가볍고 빠른 정탐선을 타고 들어와 정탐하려 할 때 군관 허사인등이 추격하였더니 적들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빼앗아와서 진린도독에게 바쳤다.
남해왜성에는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병력 약 1천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같은날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은 묘족 병사 1만 5천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예교성 북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공성전을 위한 운제거, 비루, 포차등 공성무기를 준비했다. 
9월 22일 고니시의 왜군들은 성에서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연합함대도 왜성을 향해 포를 날리는 지루한 전투 형태였다.
이날은 수로군이 크게 피해를 보았다. 제독 유정의 서로군이 왜교성 북쪽을 공격하지 않음으로 성안의 모든 왜군이 수로군만 상대하여 집중공격했기 때문이다.
수로군은 밀물이 들어오는 정오이후에 왜교성밑까지 접근해서 함포사격을 했지만 비오듯 쏟아지는 조총사격을 받고는 물러서고 말았는데, 이때 진린 부하인 유격 계금은 왼쪽어깨에 가벼운 총상을 입었고 명군 11명은 왜적의 탄환에 맞고 전사했다.
조선수군도 지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가 적탄을 맞아 부상당했다.
왜교성 가까이 진격하면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어쩔도리가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명의 수군은 적탄에 맞아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왜교성전투는 9월 22일에 격전이 벌어지고 얼마간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9월 30일에는 명의 지원함대가 도착했다. 명군 유격 왕원주, 유격 복승, 파총 이천상이 무려 전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합류했기 때문이다. “등불을 밝히니 휘황찬란하여 적도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린의 얼굴은 밝아지고 힘을 얻은 듯 10월 1일 새벽에 육지로 올라가 도독 유정을 만나 10월 2일에 수륙협공작전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자고 약속했다. 이날의 전투는 격전이었는데, 아침6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정오에 끝났다. 마침내 수로군은 함포사격을 하고 서로군 유정의 모든 명군은 대포를 쏘아대고 운제거, 비루와 포차등의 공성 무기를 가지고 왜교성아래 육십보까지 전진했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던 왜군이 갑자기 조총으로 맞서고 풀과 섶으로 불을 붙여 운제거와 비루등을 불태워버렸다. 왜군의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지자 당초 대장기를 세워 지휘했던 제독 유정은 전의를 상실하고 대장기 깃발을 내려 놓고서 독전하지 않았다.
부총병 오광의 군사가 대장의 호령이 있기를 고대하면서 때로는 순차안에 들어가 잠자는 자도 있었다.
그때 바닷물의 조수가 점차 빠져 밀려가니 수군도 물러갔다.
왜적들은 육군이 일제히 진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부총병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여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가 놀라서 100보쯤 후퇴하고 다른 진영의 사기도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 호에 이어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