亭林載書-顧炎武(정림재서-고염무)[9]

                                      매천 황현
한 수레 천권 도서 모두를 함께 싣고
만 리를 횡횡하며 안주할 곳 찾았었지
유민들 저리 근심 없이 심복 범망 느긋해.
千軸圖書一輛車   橫行萬里卽安居
천축도서일량거   횡행만리즉안거
遺民到老無憂患   心折淸人禁網疎
유민도로무우환   심절청인금망소
 
천 권 도서 한 수레에 만리 횡횡 안주할 곳, 
근심없는 유민들만 청인 심복 법망 느슨
 
본 시제는 병오고(丙午稿: 병오년 원고-1906年) 제병화십절(題屛畵十絶: 병풍 그림에 제하다) 아홉 번째다. ‘고염무(顧炎武)’는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사상가로서, 호는 정림(亭林)이다. 양명학이 공리공론을 일삼는 데 환멸을 느끼고 경세치용의 실학에 뜻을 두었다. 명나라가 망할 즈음 의용군에 참가하여 만주족에 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죽을 때까지 일체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시인 천 권의 도서를 한 수레에 모두 싣고, 만 리를 횡행하며 안주할 곳 찾았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청인들은 심복하여서 법망이 느슨해졌구나(亭林載書-顧炎武9)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 ~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천 권의 도서를 한 수레에 모두 싣고 / 만리를 횡행하며 안주할 곳 찾았었다네 // 유민들은 늙도록 저리도 근심이 없었으니 / 청인들은 심복하여서 법망이 느슨해졌구나]라는 시상이다. 이어진 오른쪽 평설에서 시상의 범상함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천 권 도서 한 수레에 만리 횡횡 안주할 곳, 근심없는 유민들만 청인 심복 법망 느슨’ 이라는 화자의 상상력이다.
위 시제는 [정림이 책을 싣다9-교염무]로 의역해 본다. 시적 상관자인 고염무(顧炎武)는 경학, 사학, 문학 각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대표작으로 알려진 저서는 [일지록(日知錄)]이다. 
그의 실증적 학풍은 청조의 고증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명말 청초의 3대 유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알려진 인물이다. 시어로 쓰인 ‘횡행(橫行)’은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거나 모로 가는 경우 등을 뜻한다. 횡행천하(橫行天下)란 사자성어가 쓰이는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함부로 횡행함을 뜻하면서 쓰이기도 한다. 다음 시어의 ‘심절(心折)’은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뜻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어의 고증을 보았을 때 시인은 시적 상관자 고염무가 결코 작게 살다가 간 사람이 아님이 시상의 주머니에 보이는 듯 하다. 천 권이나 되는 도서를 한 수레에 모두 싣고, 만 리를 횡행하며 안주할 곳 찾았었다면서 어디를 가나 책과 가까이 했음을 뜻하는 시상이다.
화자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고염무의 애민정신을 든든한 사발 위에 살포시 놓는 통쾌함을 보이게 된다. 유민들은 늙도록 저리도 아무런 근심이 없었으니, 청인들은 심복하여서 법망이 느슨해졌다는 다소 엉뚱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것은 혼자만의 시름이 아니라 책이란 벗과의 시름이자 전쟁이었을 것이다.
 
【한자와 어구】
千軸圖書: 천권의 도서. 一輛車: 한 수레에. 橫行萬里: 만 리를 횡횡하다. 卽安居: (사람들이) 안주할 곳. // 遺民: 유민들. 到老: 늙다. 無憂患: 우환이 없다. 心折: 심복하다. 淸人: 청인들. 禁網疎: 법망이 느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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