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 오일시장에 때 아닌 대한독립만세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1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내 고장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시민 500여명이 참여해 독립운동 가치를 함께 기억하며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을 재현했다.
만세의 함성이 3월 1일이 아닌 4월 1일 울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약소국의 민족자결주의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부터 시작됐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 및 시민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했다. 일본헌병과 경찰의 폭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만세’ 외침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광양의 ‘대한독립만세’ 운동은 이보다 늦은 1919년 3월 27일 오후 3시반경 광양읍 오일시장에서 정성련 의사가 처음 외쳤다. 이 외침이 광양지역 독립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광양 전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3월 29일에는 김영호(당시 16세), 박영수(당시 16세), 김석용(당시 26세)이 4월 1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으나 애석하게도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청년들의 주도아래 계획된 만세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김상후, 서경식, 박용래, 정귀인 등의 주도로 4월 1일 광양읍 오일장에서 마침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다음 날인 2일에는 옥룡면 운평리에 있는 서당 견룡재의 이기수, 김영석, 최준수, 서성식, 서찬식, 박병원, 나종길 등도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이후 광양읍 김희로, 진월면 임태일과 정순제, 진상면 황재현 등도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외치며 민족정신을 발현했다.
이처럼 광양의 만세운동은 늦었지만 탄압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있었다.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기 위해 광양시와 민주평통 광양시협의회는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지난 1일 열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이날 행사에 동참하여 내 고장 만세운동이 주는 의미를 돌아봤다.
행사는 광양시립국악단 공연에 이어 중학교 학생들이 양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입장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이후 학생·시민·독립유공자의 독립선언문 낭독, 참석자들의 만세삼창 그리고 만세행진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광양여중 학생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플래시몹을 선보이기도 해 많은 시민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만세행진은 광양읍 5일시장에서 출발해 인동숲까지 진행됐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지나가는 시민들도 함께 동참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날의 행사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장, 민족공동체의식 회복의 장, 서로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김종대 민주평통 광양시협의회장은 “내 고장 광양을 빛낸 자랑스런 3.1독립만세운동의 유공자 유족들에게 감사와 위로를 드리며, 미래의 후손들 또한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그 분들이 지켜 온 우리고장 광양, 나아가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또, 광양에서 처음 독립만세를 외쳤던 정성련 의사의 손자인 정길채 씨는 “오늘 이렇게 뜻 깊은 행사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광양에서 듣게 되어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숨져간 선열들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광양 교육청 앞에는 광양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서경식, 정성련, 정귀인, 김상후, 박용래 의사를 추모하기 위한 ‘오의사삼일운동 기념비’가 있으며, 옥룡중학교에는 이기수, 김영석, 최준수, 서성식, 서찬식, 박병원, 나종길 의사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린 ‘7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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