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과 일본과의 무역전쟁의 와중에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매국적인 주장과 목소리 역시 넘쳐난다. 외부의 공격을 퇴치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내적 단결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권과 언론, 학계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적행위와 다름없는 주장들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매국적인 주장들이 공공연하게 제기되는 이유는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막말과 주장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번 기회를 친일잔재 청산과 극일의 계기로 만들자는 국민적 염원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자체와 교육계가 친일잔재 청산에 나서고 있다. 친일인사가 만든 교가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고, 친일인사의 비석 앞에 죄상비를 세우거나 죄상문을 설치하는 자치단체도 있으며, 경기 부천시는 지역에 있는 시비(詩碑) 70개 가운데 서정주, 홍난파, 노천명, 주요한 등 친일 문학인이나 음악가의 시나 노래가 적힌 6개의 시비를 철거했다고 한다.
 
친일잔재 청산에 있어 광양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광양시민의 노래는 친일문인인 서정주의 시에 친일음악가 김동진이 곡을 붙인 것이다. 서정주와 김동진은 대표적인 친일문인과 친일 음악가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경기도지역 지차단체들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의미에서 올해 김동진이 작곡한 시민의 노래 사용중단을 선언했다. 포천시와 안산시, 여주시가 김동진이 작곡한 시민의 노래 사용을 중단하기로 한 것. 이들 자치단체들의 시민의 노래는 김동진이 작곡했지만, 작사가는 친일 문인이 아니다,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시민의 노래 사용중단을 선언하는 지자체가 늘어가고 있는데, 친일문인의 시에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광양시민의 노래가 시 승격 30주년 기념식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광양시민들은 지켜보기만 해야 할 것인가?
 
친일잔재 청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유당공원의 비석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당공원 비석 무리들 중에는 친일 매국노 조예석의 홀민선정비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의 청덕애민비가 있다. 이들 매국노들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02년이다. 탐관오리가 판을 치며, 망국의 기운이 스멀대던 구한말의 지방관이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한 공을 치하하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은 금석문을 활용한 전형적인 역사왜곡이다. 1895년에 세워진 현감 김우근의 영세불망비, 1893년에 세운 현감 민치열의 애민불망비, 1891년에 세워진 현감 한장교의 청간홍학애민비, 1885년에 세워진 현감 이민승의 애민청덕선정비, 1877년에 세워진 관찰사 겸 순찰사 이돈근의 홀민영세불망비 등도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그 비문의 내용이나 명칭에 의구심이 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선왕조 500년만 두고 보더라도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민반란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절에 광양에 부임한 현감이나 군수들이 모두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지방관이었다는 가설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재임기간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자신의 배를 불리고, 퇴임하던 시점에 다시 백성들을 쥐어 짜 자신의 송덕비를 세우게 하는 지방관들의 탐학이 망국을 부채질한 것 아니던가? 이제라도 유당공원 비석군에 공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진실을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는 것은 친일잔재 청산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 바로세우기가 될 것이다.

황망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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