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6년을 무과 준비하고 28세에 처음으로 무과에 도전했으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낙방했으나, 그 후 다시 4년을 준비하여 32세 때 식년 무과시험에 재도전하여 총합격자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하였다.
무과에 합격 이후 처음 받은 직책은 함경도 동구 비보 권관 이었다. 그 후 36세 되던 해, 이순신은 전라도 좌수영에 소속된 발포(현 고흥군 도화면)의 수군만호가 되었다. 이곳에서 1년 8개월 동안 수군 부대장으로서 일한 것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발탁되기 전의 직책은 정읍현감이었다. 무려 7계급을 특진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2개월 전 1591년 2월 13일 46세 나이에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 것이다.
그는 그 이전까지 2번의 파직과 1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었었으나, 정의와 불굴의 의지, 오직 조국을 사랑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의롭게 생활한 결과물이었다.
전라 좌수사의 임명은 선조의 훌륭한 장수 천거 지시에 의거 류성룡이 주위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인품과 무인으로서의 능력과 지도력, 사명감, 가치관을 보고 천거하여 이루어졌다.
이는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와 명나라를 구하고 조국과 백성을 구한 불씨가 되었고, 구국 제민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류성룡의 선견지명과 지혜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전라 좌수사는 방답, 여도, 사도, 녹도, 발포의 5포에 있는 수군 5부대를 직접 지휘하고, 순천, 보성, 광양, 흥양(고흥) 낙안의 5관을 관할했다.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예견하였기에, 전쟁 발발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쟁 준비에 매진하였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여수 좌수영 본영은 물론 자신의 관할구역인 5관 5포를 순시하며 장병을 사열하고 전선과 전투 무기들을 점검하고 보수했다.
또한 왜적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자에게서 왜군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류성룡이 보내온 <증손 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부하들과 깊이 연구했다.
이 책에는 주전, 육전, 화전 등의 전술이 설명된 훌륭한 병서였다.
그는 항상 활쏘기에 진력하여 명궁이 되었고 그는 수시로 개인별, 수군별 활쏘기 대회를 열어 스스로 실력을 연마하도록 독려하였다. 좌수영 진지 주변에 해자를 만들고 앞바다에는 쇠사슬을 쳐 적의 선박이 기습침투하는 것을 방지했다. 본영 뒷산 종고산에는 봉화대를 쌓아 통신 전달 체계를 갖추었다. 또한 총통화기의 보완, 전선의 건조 수리, 물적 장비 확보와 철저한 군사훈련과 화포훈련을 통한 전투력 제고와 함께 정신 무장을 통한 필승의 전라 좌수군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또한 난리를 걱정하여 거북선을 만들게 되는데 거북선은 태종 때에 있었으나, 실전에 사용되지 못했던 것을 왜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화포로 무장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3척을 완성하여 돌격 선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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