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묵)
                                    叙光 張喜久

    문방사우 일컬어져 벼루면 얼굴 묻고
    목숨을 버리면서 글씨 흔적 남겼으니
    고금을 다 아우른 들 그대 희생 누가 있나.
    文房四友已同登   硯面硏磨爾墨稱
    문방사우이동등   연면연마이묵칭
    捐命能知痕蹟赫   學徒古今愛心恒
    연명능지흔적혁   학도고금애심항

 

문방사우 일컬어서 벼루면에 연마했네, 
목숨 버려 흔적 빛나 서생들은 사랑했네

 

먹은 붓, 벼루, 종이와 함께 문방사우로 알려진다. 먹은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가지고 만든 유연묵(숫묵, 개묵)과 송진을 태워서 만드는 송연묵(참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전자인 유연묵은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 사용하고, 후자인 송연묵은 목판인쇄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 당에 송연묵을 보냈다는 기록이 중국의 [철경록]에 보이며, 고구려 고분에서도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시인은 문방사우로 이미 알려져 일컬어지면서, 벼루면에서 연마되는 그대를 묵이라 칭한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그대 목숨 버릴 줄 능히 알지만 흔적 빛나니(墨)로 제목을 붙인 칠언절구다. 작자는 서광 장희구(張喜久:1945∼ )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그대는) 문방사우로 이미 알려져 일컬어지면서 / 벼루면에서 연마되는 그대를 묵이라 칭하네 // 그대 목숨 버릴 줄을 능히 알고는 있지만 흔적 빛나니 / 고금을 막론하고 서생들 마음으로 사랑하네]라는 시상이다. 상상력은 시상의 밑바탕이 된다. 정리해 본 시주머니를 펼친다. ‘문방사우 일컬어서 벼루면에 연마했네, 목숨 버려 흔적 빛나 서생들은 사랑했네’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먹을 갈면서]로 의역된다. 먹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에 좋은 먹이 생산되고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다. 이 후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먹이 제작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양덕과 해주의 먹이 가장 유명하다. 먹의 제조는 용기에 기름을 가득 넣고 심(芯)에 점화시켜 태워서 생긴 매연을 긁어모아 고무질 혹은 교질(膠質)을 혼합하여 호장(糊狀)으로 만든 다음 조그만 틀에 부어 굳혀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시인은 이러한 먹을 만드는 과정과 원료 및 쓰임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보인 시상은 금방이라도 문방사우를 부여잡고 일필휘지라도 할 모양을 갖추는 태도를 간직해 보인다. 이와 같은 점이 훤히 들여다 보인 화자는 그대는 문방사우로 이미 널리 알려져 일컬어지고 있으며, 벼루면에서 연마되는 그대를 묵이라 칭한다고 했다. 먹의 쓰임과 생김새에 대한 자기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여 선경의 모습을 은근하게 음영했던 화자는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도 휼륭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의지를 보인 점을 높이 사고 있어 보인다. 그대 목숨 버릴 줄 능히 알지만 그 흔적이 빛나니 고금을 막론하고 서생들 마음으로 그대를 사랑한다고 위안을 보낸다. 인간세상에서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자와 어구】
文房四友: 문방사우(붓, 먹, 벼루, 종이). 已同登: 이미 알려져 있다. 硯面: 벼루면. 硏磨: 연마되다.  爾墨稱: 그대를 먹이라 칭하다. // 捐命: 목숨을 버리다. 能知: 능히 ~할 줄 알다. 痕蹟赫: 흔적이 빛나다.  學徒: 학도들. 古今: 고금에. 愛心恒: 항상 사랑하는 마음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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