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秋夕已過(추석이과)
                                    叙光 張喜久

    청녀 신 은혜 속에 산야를 물들이고
    비개인 맑은 강물 국화꽃 재촉할 때
    매사의 짧은 시간도 백성 모두 아끼며.
    秋分已過九秋還   靑女施恩染野山
    추분이과구추환   청녀시은염야산
    霽雨三韓江水潔   黎民每事寸時慳
    제우삼한강수결   여민매사촌시간

추석 지나 구월 가을 서리 청녀 은혜 받아, 
삼한 물결 맑게 하고 모든 백성 시간 아껴

 

여름철에 문이 찢어져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서 시원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었다가 7월에는 일단 창호지로 문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렇지만 8월 달에 들어와서는 찢어진 문구멍을 새로 바르는 것이 금기(禁忌)로 되어 있었다. 금기를 어기면 도적을 맞는 일이 생기고 집안에 우환이 들끓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찬바람이 들어와도 그냥 두었다가 9월에 들어서야 문을 바른다. 시인은 추석이 이미 지나 구월인 가을이 돌아왔는데, 서리신인 청녀가 은혜를 베풀어 산야를 물들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비가 맑게 개여 삼한의 강물을 맑게 하고(秋夕已過)로 제목을 붙인 칠언절구다. 작자는 서광 장희구(張喜久:1945∼ )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추석이 이미 지나 구월달의 가을이 돌아왔는데 / 서리신이신 청녀가 은혜를 베풀어 산야를 물들었네 // 비가 맑게 개여 삼한의 강물을 맑게하고 / 모든 백성은 매사에 짧은 시간도 아끼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시상 주머니를 열면서 시인과 대화하듯이 시심의 세계를 들춘다. ‘추석 지나 구월 가을 서리 청녀 은혜 받아, 삼한 물결 맑게 하고 모든 백성 시간 아껴’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추석은 이미 지났는데]로 의역된다. 추석이 지났다면 이제는 익은 곡식을 거뒤들이는 행사가 남는다. 추위에 문을 바르는 풍습과 함께 추석이 지났으니 폐장(閉藏)을 생각하면서 거둬들여야 한다. 추석을 전후하여 농가도 잠시 한가하고 인심도 풍부한 때이므로 며느리에게 말미를 주어 친정에 근친(覲親)을 가게도 했다. 떡을 하고 술병을 들고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들고 친정에 근친을 가서 혈육과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가지게 했다.
시인은 가을의 매음을 맡으면서 다소라도 한가한 한 때를 맞이하는 좋은 시절을 생각했던 것 같다. 추석이 이미 지나 구월달의 가을이 돌아왔는데, 서리신인 청녀가 은혜를 베풀어 산야를 곱게 물들었다고 했다. 시인들은 한정된 시어가 모자라 한자를 얽히고 설키면서 바람신, 계절신 등의 어휘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어휘력 확장은 물론 시적인 구성을 풍부하게 했다.
화자는 촉촉한 가을비고 개고, 말랐던 개울물도 맑게 흘러가는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에 서있음을 은근하게 들추는 시적인 맛을 일군다. 비가 맑게 개여 우리나라의 강물을 맑게했고, 모든 백성들은 매사에 짧은 시간도 아끼려는 마음을 갖고 있음이란 후정은 넉넉해 보인다. 우리네 농촌의 풍습이 나보다는 너를, 너 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했음이란 배려정신이 앞섰다.

【한자와 어구】
秋分: 추분. 已過: 이미 지나다. 九秋還: 9월의 가을이 돌아오다. 靑女: 청녀인 가을신. 施恩: 은혜를 배풀다. 染野山: 산야를 물들다. // 霽雨: 비가 개다. 三韓: 삼한. 江水潔: 강물이 깨끗하다. 黎民: 백성들. 每事: 매사에, 모든 일. 寸時慳: 잠깐이라도 (시간을) 아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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