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여수광양항만공사 앞에 설치되어 있는 판옥선 모형.
▲ 홍 정 식(관세사) 광 양 관 세 사 무 소 대표
원산지관리사 / 물류관리사장

한편, 고니시는 이순신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총과 칼 등을 선물로 가지고 와서 매우 간절히 본국에 돌아갈 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고, “ 조선 군사는 마땅히 명나라 군사와 진을 따로 쳐야 할 것인데 같은 곳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며 이순신과 진린 사이를 이간질 하였다.
이순신은 그것을 물리치며 “임진년 이래로 무수히 많은 적들을 잡아서 얻은 총과 칼이 산처럼 높이 쌓였는데, 원수의 심부름꾼이 여기는 뭐하러 찾아온다 말이냐, 총 칼은 필요 없고 너희들 대장의 머리만 보화로 여길 뿐이고, 내 땅에 진을 치는 것이야 내 뜻대로 할 일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크게 호통을 쳐서 내쫓았다. 
11월 16일이 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진린의 부하가 고니시의 왜교성으로 들어갔다. 궁지에 빠진 고니시는 다시 진린에게 함선 3척에 말‧칼‧창 등을 잔뜩 싣고 와서 많은 뇌물을 보내고 돌아갈 길을 열어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리고 “우리 군사들이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자고 약속이라도 할 수 있도록 여러 진으로 사람을 보내게만 해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다.
진린은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왜군 8명이 탄 작은 배 1척을 슬그머니 보내주었다.
그런데 진린의 병사 가운데 진심으로 이순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어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귀뜸해 주었다. 이순신은 급히 부하 장수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하고는 계책을 제시하였다.
“적의 통신선이 나갔으니 반드시 후원군이 올 것이다. 여기 있다가는 등 뒤에서 적을 맞게 될 테니 우리가 먼저 한바다로 나가서 후원하는 적과 싸워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진린에게도 이 계책을 알려주니 몹시 놀라워하고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구원병이 노량으로 몰려오면 앞뒤에서 적의 협공을 받게 되므로 기왕에 적을 맞으려면 유리한 지형인 눌림목인 노량이 그나마 선택 할 수 있는 전장이었다.
그리하여 왜교성 앞바다의 봉쇄를 풀고 후원군을 먼저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1598년 11월 17일 저녁 왜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에 알리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러 곳에서 보였다. 이 때 일본 구원군 연합함대는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와 부산포에 있었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이 합류하여, 주력인 시마즈 가문 군대의 120여척의 함선을 포함하여 500여척의 함선에 병력 1만 5천 5백여명 정도가 참전하여 남해 창선도에 집결하여 노량으로 진격하고 있어,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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