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오전 7시경 진린은 빌린 판옥선을 타고 있었는데, 주 공격대상이 되었었고, 왜 선단이 진린 함대를 세 겹으로 포위하고 왜적들이 배에 오르려하자 진린은 “나를 구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린의 명령이 있은 후 이순신은 “진린 도독을 구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때가 아침 7시경이었고, 날이 샐 무렵이었다. 명령을 받은 조‧명연합함대의 단위 함대들은 진린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진린은 이순신의 간청을 받고 끝까지 혼연일체 열심히 분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적의 대장 세 놈이 층루선에 앉아서 싸움을 독려하고 있으므로 이순신이 재빨리 쳐서 그 중 한 놈을 쏘아 죽이니, 적들은 진린의 배를 버리고 그리로 쫓아서 구원하였다.
노장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등자룡 장군은 진린을 구하는 과정에서 명군이 쏜 포탄의 불발로 배에 불이 붙었고 빌려탄 판옥선이 기울고 불이나자 군사들이 불을 피해 소동이 일어나자 왜적이 승선하여 백병전 끝에 애석하게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그 배는 불태워졌다. 왜군은 등자룡의 목을 베어 수급까지 챙겨갔다. 또 다시 이순신 함선은 최선봉에 서서 적선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적진을 돌파하고, 조선함대가 뒤를 적극 따랐다. 
조선함대의 맹공으로 일본함대는 전열이 무너졌다. 여기저기에서 포탄이 터지고 장작불이 날아오고 불화살이 날아오자 일본함선들은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일본함대는 조‧명연합함대가 내뿜는 엄청난 화력에 압도 되었다. 동이 트기 전, 큰 피해를 입은 왜군함대는 더 이상 맞붙어야 승산이 없으니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일본 선봉함선에서 왼쪽 바닷길이 열러 있다고 전해왔다. 왜군 지휘부는 일단 그 곳으로 선단을 돌려 도망가려고 선단을 왼쪽 바닷길인 탈출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은 일본으로 가는 열린 바닷길이 아니고 호리병 같은 관음포구였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폭이 좁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넓은 바다가 있는 포구였다. 남해섬을 돌아가는 외해로 오인해 만에 갇힌 상황이 되어버렸다. 왜군 최대의 실수였다. 독안에 가둬놓고 섬멸하려는 쪽과 생사를 걸고 빠져나가려는 쪽의 최악의 혈전으로 이어졌다.
이순신 함대가 적함의 출현을 기다리던 곳이 바로 관음포였다. 도망칠 바닷길이 막힌 것을 알아차린 적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순신은 대장선을 거느리고 관음포로 먼저 들어갔다. 그러자 해남 현감 유형, 당진포 만호 조효열, 진도 군수 선의경, 사량포 만호 김성옥의 전선들이 뒤따랐다. 화포를 장착한 명수군 전선도 관음포와 같은 좁은 포구 안에서는 탁월한 기동성을 발휘하였다.
왜적의 일부는 함선을 버리고 산으로 상륙하여 도망갔지만, 주력은 함선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수군은 관음포구를 포위한 이순신과 진린 함대에 맞서 사생결단의 자세로 정면 대결했다. 그러므로 전투는 더 격렬해졌고 엄청난 화력이 솟구쳤고, 그 화력은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이순신이 뒤로 물러서면서 화포공격을 명했다. 
“발포하여 모두 수장시켜라 한 척도 놓쳐서는 안된다.” 화포소리가 관음포를 뒤흔들었다.
관음포 바다가 함선나무조각과 시체로 뒤덮이고 흐른 피가 포구를 붉게 물들였다. 적과 아군의 함선이 서로 뒤엉켜 눈에 보이는 대로 격파하고 그러지 못하면 격파당하는 최근접 혼전 양상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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