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 이락사의 첨망대 전경.
▲ 홍 정 식(관세사) 광 양 관 세 사 무 소 대표 원산지관리사 / 물류관리사

이 날 정오까지 계속된 노량해전에서 왜군함선 100척을 포획하고 200여척을 불살랐으며 500여급을 참수했고, 180여명을 생포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겨우 50여척에 불과했다. 관음포 앞바다는 왜군의 시체,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 무기나 의복 등이 온통 수면을 뒤덮었고 바닷물은 붉었다. 결국 노량해전은 일본군의 대패로 막을 내렸다.
사천 왜성에서 중로군에 대승을 거두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타고 있던 어림선이 파손돼 겨우 다른 왜선에 구출되어 남은 함대를 이끌고 남해를 왼쪽으로 돌면서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한편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조‧명연합군이 왜교성 포위를 풀고 노량해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는 허겁지겁 그의 함선을 동원해 노량해전이 한창일 때 유도 서쪽수로를 통과하고 남해도 남쪽을 돌아 부산 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이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혀 대패시킨 것이 일본의 조선 재침공 의지를 꺾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가 마무리되자, 진린은 승전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순신의 기함으로 다가와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라고 외치며 이순신을 불렀다.
그러나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였고 전사한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지고 뒹굴며 큰소리로 통곡하였다. 진린 도독은 이순신의 시신을 끌어안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면서 “공은 죽은 뒤에도 나를 구했구려”하고 대성통곡하였다.
우리 군사들과 중국 군사들도 이순신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 진영 저 진영에서 모두 통곡하며 마치 어버이를 여윈 것 같이 했고 영구가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은 제사를 올리고 상여를 붙들고 울면서 “공께서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께서는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길이 막혀 수례가 가기 어려웠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남쪽사람들 중에 고기를 먹는 이가 없었고, 흰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의 영구는 관음포구 안쪽 육지의 이락사 터에 안치되었고 3일 만에 지금의 남해 충렬사 터에 가묘 상태로 안치 되었다가 고금도 수군 통제영 월송대에 가묘 상태로 83일 동안 봉안 되었다. 
이 곳은 충무공의 얼이 깃든 탓인지 아직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듬 해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 아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그 후 16년 후 갑인년(광해 6년, 1614) 어릿산 북쪽 현재의 현충사 터에 이장되었다.
노량해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정유재란 및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중에서 진린만큼 전투에 열심히 참여하고 제 몫을 다한 장군은 없는 듯싶다. 진린은 후에 손수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고 귀국에 앞서서는 아산현 고향까지 찾아가 장남 회를 만나서 조문하고 백금 수백 량을 보냈다. 또한 선조에게 “이순신은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고, 찢어진 하늘을 꿰메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키는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격찬하였다. 또 그 사실을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도 보고해 이순신에게 도독의 인수를 내리게 하고 8사품(도독인, 영패, 독전기, 귀도, 창도 등)을 하사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이어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