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묵혀둔 책장에서 의미 있는 자료를 하나 발견했다. 광양지역 최초의 신문인 ‘광양신문’ 창간호다. 1991년 11월 2일, 토요일자로 발행된 신문이다. 세로쓰기 편집에 8포인트 정도의 작은 서체,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제목과 본문들. 광양 지역신문의 역사가 이 신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광양신문’의 창간호를 펼쳐보면서 개인적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 창간호를 만들기 위해 광양지역 곳곳을 찾아다녔던 옛 기억들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그렇지만, 광양 최초의 지역신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휴간 끝에 사주가 바뀌기도 했지만 지속 발행기간은 1년을 채 넘지 못했다. 광양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이 종언을 고하고, 당시 발행됐던 신문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다시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들이 신문을 만들었지만, 그 뒤를 잇는 신문들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지역 언론의 여건이 얼마나 척박했는가를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 광양의 지역신문들은 웅변하고 있다. 광양의 지역 언론 토양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2000년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역신문이 발행되기는 했지만 정기간행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휴간과 정간을 되풀이했다. 광양만신문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2003년 7월 23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광양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인 ‘광양신문’이 발행된 지 29년이 흘렀고, 광양만신문이 독자들과 만난지 17년이 지났다. 그 오랜 시간만큼이나 언론환경은 크게 변화했다.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 유튜브 등 새로운 채널의 등장은 언론환경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신문이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있다. 그럼에도 지역 언론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광양신문’ 창간호에는 광양지역 원로 서예가인 청원 홍은옥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50대 초반의 청원선생은 당시 광양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면서 ‘청원서예학원’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청원 선생의 인터뷰 기사에는 체신노조 광양지부장 김득한씨(당시 56세), 선생을 도와 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호은 양한택 선생(당시 68세), 선생의 장녀 홍현미씨가 등장한다. 오전 5시 30분 기상해 집배원으로 일하던 직장과 퇴근 후 서예학원 원장으로 일하는 청원선생의 일상이 담겨있다. 대략 30년 전의 기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당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청원 선생도 팔순이 되었다. 팔순의 청원 선생은 광양만신문의 창간 17주년에 맞춰 고담준론(高談峻論)과 불편정론(不偏正論)을 휘호로 보내주었다. 광양만신문이 앞으로도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신 것으로 무겁게 받아들인다. 불편정론의 자세로 고담준론을 펼치는 신문이 될 것을 창간 17주년을 맞아 거듭 다짐한다.

황망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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