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강면 석사리 서석(西石)마을은 구석기시대 후기(BC 약 8000년) 유물이 산포되어 있는 마을로 그 역사를 추산하게 되면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광양고을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광양 고을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문헌상 기록으로 마을연혁을 살펴보면 1600년경 광양현 북면 며내리(旀內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며내면(旀內面)에 속했다. 1789년 경에는 며내면 석현촌(石峴村) 지역이었으며,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봉강면 서석리(西石里)라 하여 현재 마을이름이 옛 지도상에 처음 등장했다.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봉강면 서석리(西石里)라 하였고, 행정구역 개편 후인 1917년에는 봉강면 석사리(石社里)에 속했다. 
1987년 1.1기준 광양군행정구역알림에 의하면 봉강면 석사리(법정리), 석사2구(행정리)지역으로 서석이라 하였고, 현재는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법정리)에 속하여 행정리상 서석(西石)이라 하고 있다.

■ 돌고개에서 유래
서석(西石)이라는 마을이름의 유래는 동석(東石)에 있는 돌고개에서 연유한다. 돌고개는 동석에서 지곡리 각비마을로 가는 고개로써 예로부터 돌이 많았던 곳인데, 이 돌고개를 중심으로 서쪽을 ‘서돌고개’ 또는 ‘서석(西石)’이라 했으며, 동쪽을 ‘동돌고개’ 또는 ‘동석(東石)’이라 이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쓰여 지고 있으며, 현재 동석마을 입구에 는 서석마을 가는 길과 동석마을 가는 길을 표시한 이정표가 세워져 마을을 찾는 이들을 안내하고 있다.
석사리(石社里)의 이름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시 사직리(社稷里), 신룡리(新龍里), 지경리(地境里), 서석리(西石里), 동석리(東石里), 옥현리(玉峴里)와 칠설면 마산리(馬山里)일부, 순천군 서면 학동리(鶴洞理) 일부를 병합하게 되면서 동석(東石)과 사직(社稷)의 이름의 ‘석’자와 ‘사’자을 따서 석사리(石社里)라 하게 됐다.
그 외 마을의 옛지명으로는 가눔정(서석 서남쪽에 있는 마을 또는 이곳 마을로 가는 길, 길이 좁다하여 생긴 것), 산짓골(서석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이곳에서 산제를 지냈다), 대동고개(서석에서 순천시 왕조동으로 가는 고개), 군계교(가눔정 북동쪽에 있는 다리, 승주군과 광양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등이 있다.

■ 매천 황현선생의 마을
누가 뭐라해도 서석(西石)마을의 자랑은 매천 황현선생이다. 한말의 우국지사 황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그의 생가와 묘 그리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영모재가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마을 내의 옛 생가(석사리 1135번지)는 지난 2002년에 광양시가 복원해 현재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으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황현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여 29세에 특설보거과에 급제했으며, 34세에는 생원시에서 과거급제 했다. 하지만 시국의 혼란함과 조정의 부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급제와 동시에 낙향하여 구례에 살면서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일제에 항거하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국했다. 
즉 매천 황현 선생은 따뜻한 감성으로 2,500여 수의 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시대를 정확히 기록한 위대한 역사가였다. 망국의 시기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그는 고결한 선비였다.
매천 황현선생의 묘가 자리한 곳은 서석마을 산기슭이다. 장수 황씨 묘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봉분은 직경이 3m이고, 높이는1.4m에 달한다. 무덤입구에는 매천 황현을 추모하는 영모재가 있다.
서석마을 사람들은 매천 황현선생의 절개와 정신이 오늘날에도 후진들에게 계승되길 바라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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