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곡면 의암마을은 원래 상의, 하의, 월앙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광영의암지구 택지개발로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옥곡 의암(衣岩)마을은 1789년경에는 옥곡면 신진촌(新津村)지역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진리(新津里), 금촌리(錦村里), 신기리(新基里) 일부지역과 함께 병합해 신금리(新錦里)에 속하게 됐다. 
1987. 1. 1기준(광양군행정구역일람)에 의하면 광양군 옥곡면 신금리(법정리)에 속해 행정리상 신금5구가 되어 상의(上衣), 하의(下衣), 월앙(月仰)의 자연마을이 있었고, 현재는 광양시 옥곡면 신금리(법정리)에 속해 행정리상 의암(衣岩)이라 한다.

■마을형성과 지명유래
의암마을은 1687년경 진원박씨(珍原朴氏)가 처음 입촌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장동리 동남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상의(上衣)·하의(下衣)·월앙동(月仰洞) 정자 등의 자연마을로 나뉘는데 의암(衣岩)은 당시 마을 앞의 바위가 마치 여인네가 치마를 입고 있는 것 같이 보여 여기에 연유해 마을이름을 의암(衣岩)이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옷바구 즉 상의(上衣)라 하였고,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하의(下衣)라 불렀다. 
월앙동은 광영으로 도로확·포장된 지역이 반월형(半月形)이고 이 지역이 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 즉 옥토망월형국(玉痒望月形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로 이곳에 정자나무가 있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불러지게 됐다.
옷바구와 관련하여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바위가 세 곳에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월앙동, 즉 배나무 선창이 있는 정자나무 거리에 있는 돌인데 어사 박문수가 ‘의암’이라고 직접 쓴 글씨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찾을 수 없으며 또 하나는 안또(모퉁이 밖) 도로변에 쌍둥이 바위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나머지 하나는 하의마을 도로변에 위치한 일명 비럭바구라고도 부르는데, 여자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형국이었다고 하는데 도로 확·포장으로 훼손되어 현재는 돌부리 일부만 남아있다.

■특정지명과 주요시설물
의암마을 앞에 위치한 옥진평(옥진평)은 지금은 옥곡면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로 변했는데 옛날에는 옥곡천과 진상면 수어천 하류지역에 위치해 조수가 드나드는 갯벌지역으로 갈대가 넓게 자생하는 잡종지였다. 
이 지역을 간척해 농경지로 조성하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1957년 옥진수리조합이 설립되고 간척공사가 착공돼 1962년에 방조제 축조 및 방조제 내부공사를 완료했다. 이곳 옥진평은 현재 들판을 가로질러 광영동으로 오가는 4차선 도로가 개설·관통하고 있어 옥진평이 두 개 지역으로 나뉘어져 옛 모습이 크게 변모됐다.
현재 의암마을에는 신금공단과 배수펌프장, 덕진 광양의봄 아파트가 들어와 있는데, 신금공단은 광양제철소와 연관되는 공단으로 주로 철제 가공을 하고 있으며 지역경제활성화와 광양시 세수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정지명으로는 갯샘이와 광폿재가 있다. 갯샘이는 상의와 하의마을 사이에 있었으며, 옥진평야가 조성되기 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었는데 산과 거리가 먼 이곳 갯가에서 샘이 솟아나 갯샘이라 하였다고 한다. 광폿재는 마을에서 광영리 광포로 가는 고개로 세갈래 길이 나 있으며 도로가 확·포장되어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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