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거마을은 진상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중심권역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었다. 사진은 삼정봉을 비롯한 역촌광장, 동제 제단 모습 등

섬거(蟾居)마을은 진상면사무소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300m만 올라가면 보이는 마을이다.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마을의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상면에서 가장 큰 마을인 섬거마을은 예전부터 그 위상이 남달랐다. 옛 문헌(지도)을 기록할 때 ‘진상면’ 표기를 생략할지언정 ‘섬거마을’은 꼭 표기했으며, “진상면장을 할래? 섬거이장을 할래?”라고 물으면 “섬거이장을 한다”는 말도 생겨날 정도였다. 그만큼 섬거마을이 진상면에서 중심 권역이었고 수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마을형성 및 지명유래
섬거(蟾居)마을은 약 720년 전에 허(許)씨, 장(張)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구전되어 오며 1700년대 초부터 규모 있는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마을이름이 섬거(蟾居)로 불리게 된 것은 섬진강의 두꺼비 전설과 맞닿아 있다. 섬거(蟾居)마을의 ‘섬(蟾)자’가 ‘두꺼비 섬(蟾)’자를 쓰는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삼정봉(三政峰), 매봉(鷹峰), 각삼봉(角三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이 형태가 두꺼비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또 이곳에는 예전에 역(驛)이 있었는데 역 이름을 섬거역(蟾居驛)으로 불러왔으며,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섬거(蟾居)로 명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섬거마을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섬진나루에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과도 연결된다.
특히, 마을 서남편에 위치한 삼정봉(三政峰)은 풍수지리상 세 정승이 이곳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고 전하는데 한 정승은 이미 나왔으며(법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정객 엄상섭을 가리킴), 앞으로 두 정승이 더 나올 것이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각삼봉(角三峰)은 기꽂몬당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로 새똠 뒷산에 위치하며, 매봉(鷹峰)은 기꽂몬당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응봉(鷹峰)이라고도 한다. 마을 서북방에 위치한 각삼봉(角三峰)에는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둘레 300m로 축성(築城)하였던 흔적이 남아있고 그 곳 중심부에는 봉화대 자리가 남아있다.
옛 섬거역은 현 섬거회관 자리인 진상면 섬거리 619번지에 위치했는데 당시 섬거역에는 역리(驛吏) 94명, 노비 5명, 역의 소유인 역둔답(驛屯畓)이 160두락이 있었다고 전해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섬거마을에는 조금은 특별한 곳이 있다. 마을 오른편에 있는 동학정이 그곳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한 쉼터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가슴 한편을 시리게 만든다. 
섬거회관 오른쪽 골짜기에 가장골똠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1894년 관군에 쫒긴 동학군을 가매장하면서 이 마을에 아픔을 안겨준 것이다. 
이때 희생당한 농민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동학정이 세워졌고, 마을 주민들은 이들이 그저 민초나 이름 없는 농민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섬거마을에는 수령이 320년이 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 주위로 정자(亭子)똠, 큰 부자가 살았던 장자(長者)골똠이 있다.
또 이 마을에는 불교를 숭상하던 시절에 승려를 송별하였던 곳으로 마을 앞에 별승대(別僧台: 소리가 바뀌어 ‘변대거리’ 또는 ‘별신대거리’로 부름)가 있다. 
언제부터인지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자정에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90년 전 참봉 장주환(張周煥)이 동장(洞長)으로 있으면서 동유림(洞有林) 150정보를 조성하였는데, 그 뒤 수익금으로 동유답 1,782평을 마련했으며 동유답 수익금으로 동제를 지내는 경비와 이장의 이정세를 충당하고 있다. 
마을회관과 정자나무, 그리고 역촌광장이 모두 한곳에 어우러져 있어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마을의 주요행사를 할 때 이곳으로 모이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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