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파마을은 월파공의 호에서 비롯되어 이름된 마을이다. 현재는 해비타트의 사랑의 짓기 마을로 더 유명하다. 사진은 위에서 부터 시계방향으로 월파마을 하우스 전경, 월파마을 표지석, 우산각, 마을회관 순이다.

월파(月波)마을은 광양읍 교촌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양읍에서 옥룡 방향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광양현 동면 우장리지역으로 추정되는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우장면에 속하였다. 1789년에 우장면 월파촌이라 하여 문헌상 마을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현재는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에 속하여 월파마을이라고 한다.

■월파공의 호에서 비롯
월파마을은 1500년쯤 밀양박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월파마을이라는 이름은 이천 서씨인 서신귀(徐藎龜)의 호인 월파(月波)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월파(月波) 서신귀(徐藎龜)는 이조 중종 때 암연처사 서천익의 후손으로 약 330년 전 사람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향교의 재정이 어렵게 되자 60두락의 논을 희사하는 등 선행을 베푼 인물이기도 하다.
암연처사 서천익(徐千謚)공은 성종15년(갑진 1484)에 출생해 학문에 정진하면서 한 번도 벼슬길에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연정’(巖淵亭)이란 정자를 지어 후진양성을 위해 갖은 힘을 써 그 문하에 지명(知明)의 선비가 많이 배출됐다. 
월파공유적비 비문에 의하면 월파공 서신귀(徐藎龜)는 이곳에 유배 온 고산 윤선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가 향교 중건에 관여한 내용 등 당시 공적기록이 실려 있다.
이 마을의 월파대(月波臺) 역시 서신귀로부터 비롯됐다. 월파대(月波臺)는 서신귀(徐藎龜)가 낚시하였던 곳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월파대라 하였다. 현재는 바위 위에 비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또 이 마을에는 마을 좌측 산자락 아래에 광산굴터가 존재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금을 채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사랑의 보금자리로 정착
이 마을 입구에서 보면 산등성이 아래에 기존의 시골집과는 확연히 다른 공공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공공주택은 한국 해비타트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신혼부부나 다자녀가정 등을 위해 제공하는 다세대주택이다.
한국해비타트의 집짓기는 지난 1980년 후반부터 기업들의 건축자재 지원과 설계, 집짓기 막일까지 모두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월파마을에는 해피타트 전남동부지회에서 무주택서민의 집 없는 설움을 끝내고 지역공동체내에 건강한 가정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사랑의 집짓기를 진행해 보금자리를 헌정한다.
현재 월파마을에는 월파마을 하스빌 1차 5개동 20세대, 2차 1개동 10세대, 3차 3개동 12세대, 4차 2동 12세대 등 54세대가 입주해 있으며, 앞으로 연차적으로 약 72세대의 집을 지어 무주택서민에게 분양할 계획이다.
해비타트 입주가정 선정 기준이 크게 까다롭지는 않지만 주택 건축 현장에서 자원봉사에 참여해야한다는 의무사항을 두고 있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자신이 직접 짓는다는 의미를 담는 것.
이제 월파마을은 해비타트의 사랑의 집짓기 마을로 더 유명하다. 많은 이들이 자원봉사를 통해 이 마을을 찾기에 앞으로도 월파마을은 더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양재생 기자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