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두마을은 베틀의 머리에 해당되는 지역이라는 뜻이며, 마을 한켠에 있는 기두유적에는 고인돌 및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주거지가 복원되어 있다.

광양읍 용강리 기두마을은 1999년 12월 발굴조사결과 청동기시대에 대규모 취락지가 이 지역에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옛 시대의 유적·유물이 발견된 마을이다. 선사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마을의 역사는 마을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베틀의 머리에 해당하는 마을
기두마을 일대는 1999년 용강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 이후 현재는 마을 뒤쪽에 대단위의 주택단지가 위치하고 도로확장 및 주택정비 등으로 옛 농촌마을이 도시화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기두마을은 지금까지도 마을회관 옆 당산나무를 비롯해 옛 가옥의 모습을 간직한 주택 등이 여전히 남아 있다.
기두마을 최초 형성시기는 청동기시대여서 역사기록상 그 당시 주민생활상을 확인 할 수 없으나 전하는 이야기로는 1336년경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13대를 이어 오다가 자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하고, 1706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기두(機頭)란 이름그대로 풍수지리상 베틀의 머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옥녀봉(玉女峰)의 옥녀가 베틀을 놓고 비단을 짜는 형국에, 이 마을이 베틀의 머리에 해당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기두마을은 광양읍 용강리에 속하여 행정리상 기두(機頭)라고 하는데, 용강리(龍江里)이름 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와룡리, 관동리, 검단리, 강정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와룡과 강정의 이름을 따서 용강리라 한 것이다.
마을 뒤에는 옥녀봉이 있고, 그 옆에 말간자리(말등어리) →투구봉 →마로산성이 차례로 위치하고 있으며, 옥녀봉과 말간자리 사이 골짜기를 ‘절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절 밑에는 저수지가 있다. 옥녀봉을 매봉이라고 하는데 매봉아래에 위치한 매방울등은 명당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 기두 고인돌 유적
이 마을에서 발견된 기두유적은 용강택지개발지구 내에 포함되어 1999년 12월부터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이곳 유적지를 조사했다. 유적의 내용은 지석묘 4기, 지석묘 관련 석곽묘 30기,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수혈수구,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등이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편∙홍도편 등의 토기류와 돌끌∙마제석검∙마제석총 등의 석기류 외에 소옥(小玉) 등으로 청동기시대 유물로 확인됐다.
현재 용강도서관에서 우측 50m지점에 용강2 어린이공원이 있는데, 그 놀이터 앞 언덕에 오르면 용강리 기두마을 ‘나’ 고인돌 유적지가 복원·조성돼 있다.
여기에 있는 고인돌은 기두마을 동남쪽 구릉에 있던 것으로 발굴조사 후 이전·복원한 것이다. 조사 당시 고인골과 석곽묘는 대게 등고선과 나란한 동서 장축방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4기 고인돌 가운데 1기만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었고 2기는 매장주체부가 없는 묘표석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지석묘와 석곽묘의 잔존상태를 고려해 지석묘4기와 유구가 비교적 온전한 석곽묘 2기만 이곳으로 이전·복원했다.
또 기두유적지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삼국시대주거지가 복원되어 있다. 청동리시대와 삼국시대 주거지는 용강리 관동 10호와 82호 주거지를 복원한 것이고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원형계 주거지고 삼국시대 주거지는 방형주거지에 해당한다. 복원한 주거지 뒤로 현대식 아파트 가 자리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의 공존모습을 볼 수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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