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망기 발행인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별법 제정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73년 피맺힌 한을 풀어주는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제주 4.3항쟁과 맞닿아 있다.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이념대립 속에서 1949년 10월 19일,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항쟁의 진압을 거부하며 시작된 여순사건은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활동으로 이어졌다. 해방공간의 좌우 이념갈등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양민이었다. 군경에 의해, 빨치산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의 학살이 자행됐다. 재판도 없이 자국의 군경에 의해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의 길을 여는데 자그만치 73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었다. 여수와 순천에 사는 사람들이 반란의 주체가 된 것처럼 불리었으며, 독재정권 시절의 엄혹한 연좌제 아래서 피해자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여순사건으로 정리됐다. 그렇지만, 여순사건의 피해자는 여수와 순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양과 구례를 비롯한 전남 동부권은 물론 하동과 산청, 함양 등 지리산을 끼고 있는 경남 서부권지역도 여순사건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소속 군인들은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6.25전쟁 이후까지 빨치산 활동을 펼친다. 여수지역의 경우 반란군이 순천을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한 후에 도착한 국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됐다. 이른바 ‘손가락 총’으로 불리는 재판 없는 처형이 자행된 것이다. 이러한 양민학살은 여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군경에 의한, 빨치산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는 무고한 양민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을 둔 유족들은 70여년의 세월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이러한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길을 연 첫걸음이다. 얼마 전 6.25전쟁 71주년 전라남도 기념행사가 광양에서 열렸고, 같은 날 광양YMCA를 비롯한 영호남YMCA연합회는 70여년 전 비극의 현장인 지리산 노고단을 찾아 한반도 평화대회를 열어 평화를 염원했다.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이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을 위한 해원의 출발점이 되고, 화해와 상생, 평화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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