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곡마을은 조선시대 문장가 최산두 선생을 배출한 마을이다. 사진은 마을전경, 당산나무, 마을정자쉼터, 마을회관, 마을 표지석 등이다.

저곡(楮谷)마을은 닥실 또는 월곡이라고 부르며, 봉강면 부현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름이 닥나무 저(楮)를 사용하고 있어 닥나무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789년경에는 며내면 저곡촌(楮谷村)이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기록되어 전하였고 지금은 봉강면 부저리(釜楮里)에 속하여 행정구역상 저곡(楮谷)이라 부르고 있다. 

■석기시대 유물 출토
저곡마을은 1730년 경 김해 허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관련 문헌과 이곳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보다 앞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석도(石刀)가 출토되었고 옛 선대인들의 생활용품인 자기와 토기 파편이 있다.
마을은 저곡촌→월곡리, 내저리→저곡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사실 이 마을 옛날 이름의 원뿌리는 ‘닥실’ 또는 ‘달실’이었으며, 전문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닫골→닥골→ 닥실·달실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닫골’이라 하는 옛말의 뜻은 ‘산골 골짜기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닥실’이 한문식으로 저곡(楮谷)으로, 달실은 월곡(月谷)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서 전하는 이야기로는 옛날에 이 지역에 닥나무가 많다하여 닥실·달실로 불렀다고 전한다. 닥나무는 뽕나뭇과에 속한 낙엽 관목인데 열매는 약재로 쓰이고, 껍질은 한지를 만드는 데 쓰인다.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이 닥나무로 마을이 번창할 수 있었음이 짐작된다.  
한편 월곡(月谷)의 유래는 마을 북쪽 산의 형국이 떠오르는 달의 모습과 같은 반달형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있다.

■문장가 최산두 배출
저곡마을의 출신 인물 중 빼어난 문장가인 최산두(崔山斗,1482 ~1536) 선생이 있다. 
최산두 선생은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정기가 백운산에 내린 까닭으로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산(山)은 백운산의 정기를, 두(斗)는 북두칠성의 영기를 각각 뜻한다고 전한다.
최산두 선생의 부친은 한성판윤에 증함을 받았던 한영(漢榮)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였다. 
그는 8세때 부터 시를 지었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가지고 있어 22세 되던 1504년에 진사에 올랐고, 31세에는 별신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홍문관 저작· 박사, 홍문관 수찬·홍문관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보은 현감이 되었으며,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사람 26명을 선발하였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저곡마을에서 동북쪽 화전봉 능선아래 중턱에는 최산두 선생의 묘가 위치해 있으며, 무덤 앞에는 석인상이 있고 한단 아래에는 망주석이 있다. 최산두 선생은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윤구와 함께 『호남산걸』이란 칭호를 받았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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