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동마을은 윤선도 선생의 마지막 유비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사진은 태극가 게양되어 있는 마을 전경, 정성현 선생 3.1운동 기념비, 마을회관, 표지석 등이다.

옥룡면사무소에서 도선국사 마을로 올라가다 보면 추산 보건소 앞에 커다란 표지석이 나온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마지막 유배지’라고 쓰여 있는 표지석인데 고산 선생의 행적이 간략하게 적혀있다. 
윤선도 선생의 마지막 유배지로 더 유명한 이 마을은 옥룡면 추동마을로 백운산 자락의 한줄기로 이어진 야트막한 산 밑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추산천을 경계로 동북쪽에 새로 형성된 ‘샛똠’지역을 포함한다. 

■돛대를 닮은 마을
추동마을의 입촌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근 옥룡사의 연혁을 참고하면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 부근에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동마을 입구에 ‘말읍더리’란 지명은 옛 옥룡사와 관련된 마을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추동마을을 가라골 또는 가래골이라고 했는데 신라시대에 사용된 마을 이름으로 추정이 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마을 뒷산이 배(船)의 형국이고 마을의 터는 돛대 형국이라 돛대의 재료인 가래나무에서 ‘가래’를 따와 ‘가래골’이 된 것이며, 이를 한문식으로 쓰면서 추동(楸洞)이라 불렀다가 뒤에 가을 추(秋)를 쓰면서 추동(秋洞)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향토 어학자들의 견해로는 전남도내에서도 옛날 가라골(楸洞)이라고 불렀던 마을이 여럿 있는데 골짜기 형국을 보고 갈라진 곳에 있는 마을, 즉 동곡계곡 입구와 추산 계곡 입구가 되는 이 지역이 계곡 양쪽으로 갈라진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상산·중산·외산마을을 합하여 옛날에는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내촌(內村) 또는 산내촌(山內村)이라고 하였다.

■고산 윤선도 귀양지
추동마을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마지막 유배 생활을 한 장소로 전하는 곳이다.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부 윤유심과 모 순흥안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현종 12년(1674년) 완도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윤선도 선생은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로 당시 서인(西人)측에 정치적으로 패해 오랜 세월 유배 생활을 했다.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때는 해남과 완도 보길도를 중심으로 은거 생활을 했으며, 유배지와 은거지의 자연은 시를 짓는데 좋은 소재이자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대상이 됐다.
선생이 79세가 되던 1665년(현종 6년)에 추동마을로 유배되어 2년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며, 그가 남긴 문집인 ‘고산유고’에 이 마을에서 지은 시 몇 수가 전해져오고 있다. ‘삼가 하운하여 겸재의 고요한 서안에 바침’, ‘원운’, ‘나경주의 만사’, ‘사간 이연지의 시에 차운함’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 이 마을에는 ‘의사하동 정공성현 3·1 운동 기념비’가 있다. 이 비는 의사 정성현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8월 건립되었으며, 현재 추산 보건소와 추동교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정성현 선생은 1919년 3월 27일 광양읍 장날에 단독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계획하여, 태극기 3매를 만들어 장터로 나가 수백 명의 장꾼 앞에서 태극기를 장대에 메어 머리 위에 높이 들고 흔들며, “만세, 만세,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 피체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장에 추서했다.
특히 추동마을은 태극기와 연관이 깊은데, 마을 입구에는 국기 게양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태극기를 사랑하는 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추동마을은 지난 2016년 8월 당시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도선국사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태극기를 사랑하는 마을’사업을 추진했으며, 현재도 이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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