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과마을은 이름에서부터 모과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모과가 나무에 달리는 참외 비슷한 열매라 하여 목과(木瓜) 또는 목과(木果)라고도 쓰기 때문이다. 진상면 청도마을과 입암마을 사이에 위치한 목과마을이 어떻게 모과와 연관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 모과나무골

목과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 진상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상면에 속하였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진상면 청암리 목과리(木果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났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원리, 중양리, 청룡리, 입암리와 함께 병합되면서 청암리에 속하였다. 목과마을은 1650년쯤 진양정씨(晋陽鄭氏)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청룡마을 남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모과나무골’로 불리었다. 옛날 이 마을 당산에 큰 모과나무가 있어 ‘모과나무골’로 불렸다고 하는데, 모과란 이름이 목과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목과(木果)로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 당산나무가 있지만 모과나무는 아니다. 150여 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당산나무 바로 아래에 정자를 만들어 놓고 있다. 한편으로 목과마을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도 가지고 있는데 산의 옛말인 몰>말>몰에 마을을 뜻하는 ‘골’이 더해져 산골마을 즉 몰골이 몰의골-모랫골-모갯골로 바뀌었고, 이를 한 자로 쓸 때 모개를 모과의 사투리로 보고 목과(木果)로 이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이조판서가 정려문을 쓴 효자 양복수

목과마을은 약 220년 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양복수 씨에 대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부친상을 당한 양씨가 3년간 시묘(侍墓: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 동안 묘를 보살피며 지내는 일)를 하던 중 동짓달 날씨에 소(沼)에서 숭어를 잡아 부친의 묘상(墓床)에 올렸다는 효성어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때 양씨가 숭어를 잡았던 소를 ‘숭어소’라 했다 한다. 오늘날 수어천(水魚川)이라는 지명유래가 숭어소에 연유하여 ‘숭어’가 ‘수어(水魚)’로 변음되어 수어천(水魚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이 마을 효자 양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효자문이 세워져 있었으나 왜정시대에 유실되어 지금은 없다. 하지만 효자문은 없어졌지만 그분의 정려(旌閭)는 현재 진상면 청암리 388번지 목과 마을에 소재되어 있다. 효자 양복수는 이 마을에서 1779년에 출생했으며 본관이 남원(南原)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공신이었던 이조판서를 엮임하고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양성지(梁誠地)의 12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양복수의 후손들의 전하는 이야기로는 정려(旌閭)가 원래 세워진 위치는 목과마을 앞 도로변을 따라 청도마을 방향으로 약 200m 쪽, 옛 숭어 나루터 부근으로 효자문이라고 부르는 특명지명을 갖는 지역이라 하며, 그 후 동학난 등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에 문중에서 관리하기 편한 현재의 지역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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